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군 (문단 편집) ==== 2차대전 시기 [[이탈리아 왕국군]]의 이면 ==== 이탈리아 군부 내에는 수십 명의 유대인 장성들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인으로서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싸우다 죽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저렇게 독일인들이 유태인 학살에 환장하는 걸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로 전근대 시기에는 독일어권 지역보다 남유럽 지역이 더 유대인 박해가 심했는데 근현대에 와서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독일이 강력해짐에 따라 이탈리아 측의 입장은 약해졌고 반유대정책을 실시하라는 독일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솔리니는 전쟁 직전부터 유대계 재무장관이였던 구이도 융을 좌천시키는 등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나 어떤 이탈리아 유태인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자발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로 보내진 것은 이탈리아 왕국의 무솔리니 정권의 붕괴로 파시스트 잔당들이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독일의 괴뢰정권]]을 수립한 이후의 일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도 적지 않은 이탈리아 정규군이 친위대를 중심으로 한 독일군의 유대인 박해를 실력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로 인한 이탈리아 유대인 희생은 총인구의 20% 선에서 억제되었으며 이는 추축 가담국 중에서는 [[핀란드]]와 [[덴마크]], [[불가리아]]를 제외하면 제일 낮은 수치였다. 그나마 핀란드는 단 22명만이 1944년 핀란드의 대독 선전포고 때 라플란드에서 탈출하던 독일군에게 보복으로 학살당했을 뿐이고 덴마크와 불가리아는 당시 지배층들의 기지와 계책으로 수 많은 유대계 주민들이 나치에 의해 사망하지 않고 생존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이탈리아가 최저다. [[헝가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유대인을 수호했으나 본래 민중 차원의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던 국가라 막판에 [[나치즘]] 성향의 [[화살십자당]]에 의해 대량학살이 벌어져 단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60~70%가 희생당했다. 그와 별개로 이탈리아군이 대단한 것은 이탈리아 유대인뿐 아니라 자기들이 주둔한 점령지에서도 유대인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크로아티아]], [[그리스]],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북아프리카]] 등지의 이탈리아 점령지에서는 독일 점령지에서와 같은 유대인 색출이나 박해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점령지를 독일군에게 인계하고 이탈리아군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자 그 지역에 독일군이 들어왔을 때 유대인들이 처하게 될 운명을 걱정한 나머지 자기들의 철수 열차에 현지 유대인들을 태워 이탈리아 본국으로 함께 데리고 갈 정도였다. 또한 [[독일 국방군|독일군]]이 많은 경우 점령지를 공포로 지배한 것에 비해 이탈리아군은 어디까지나 대체로는 주민들과 어울려 산 편이였다.[* 주둔지 식단이 맛이 없다면서 현지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돈을 내고 음식을 사서 먹고'''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 이탈리아군은 온갖 전쟁 범죄로 악명이 자자한 독일군 및 일본군과 달리 대전기간 내내 민간인 학살 등 별다른 중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점령지의 현지인이나 연합군 포로를 비교적 정중히 대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유머이지만) 영국군 장교가 이탈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 상당히 거창한 식사를 받자 처형을 앞둔 최후의 만찬이라며 낙담하는데, 다음 날 이탈리아군 장교가 "어제는 행정 착오로 귀관에게 일반 병사 식단을 제공했다. 앞으로는 장교 계급에 어울리는 식단을 제공하도록 약속하겠다."라며 사과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지경. ] 이는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라는 불명예를 [[독일]]과 [[일본]]보다 덜 짊어지게 하는데 확실히 기여했다. 당장 이탈리아 영화 《[[지중해(영화)|지중해]]》나 [[니컬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 《[[코렐리의 만돌린]]》을 보면 그리스를 독일과 분할 점령한 이탈리아군이 어떻게 지냈는지 잘 나와 있다. 독일군들과의 마찰로 이탈리아군이 학살당한 전적도 있는데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그리스 케팔로니아 섬에 주둔중이던 이탈리아군 마키 사단이 현지 주민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저항한 후 항복했으나 사단장을 비롯한 5,000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포로수용소에서 여친을 사귄 사례도 있다.[* 호주나 미국에서는 포로수용소 밖 농장에 가서 일도 해주고 그랬는데(전쟁포로는 국제법 상 전쟁과 관련없는 직종에 종사해야 한다.), 복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아 탈출했나 싶었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문열어 달라고 아우성을 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즉, 탈출할 생각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지각(..)] 그래서 전후 전선에서 돌아온 연합군 장병들이 ''''우리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포로 녀석들은 편하게 여자나 꼬시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포로로 잡히면 툭하면 자살하려 들고, 독일군은 포로로 잡히면 툭하면 도망치려 하고, 이탈리아군은 포로로 잡히면 툭하면 '''작업'''에 열중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면서 불평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전공을 살려 자신들이 먹을 빵도 직접 만들고 옷도 수선하는 등, 연합군의 시각에서 본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정말 행복해 보일 지경이었다고...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러한 면모는 부풀려진 감이 없잖아 않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후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자 이탈리아는 매우 억압적으로 통치했으며, 에티오피아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밖에 [[리비아]]에서도 리비아 저항군에게 20년 넘는 게릴라전에 시달리자 그야말로 학살로 대응하던 것도 이탈리아군이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점령한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 지역의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그리스 침공]]시기 이탈리아군에게 죽은 그리스인 주민들도 꽤 많다. 또한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친독 파시즘 인사들이 세운 [[살로 공화국]]에서는 수천명의 유대인과 저항군이 학살당한 전적도 있다.[* 살로 공화국 치하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은 8천명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살로 공화국은 제대로된 군대조차 없어서 게릴라 소탕도 하기 힘들지경이라 수십만명을 학살할 수준이 못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이탈리아 왕국에 비하면 살로 공화국이 사실상 독일의 보호국, 괴뢰국 수준인 것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