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군 (문단 편집) === 근현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탈리아 왕국군)] 그러나 19세기 이후 20세기까지의 이탈리아군은 [[행군]]이나 [[사열]] 등 뽀대를 중시하는 데 반해 전투력이 약하다는 점 때문에 별로 평이 좋지 않은데, 이는 통일 과정의 후유증으로 볼 수 있다. 일단 통일국가 이탈리아라는 것이 생겨난 게 겨우 1866년의 일이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즉 북부 이탈리아가 주도한 통일이며 국가의 통합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복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남부인들로서는 이 나라에 충성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근대화의 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북부지방은 공업화를 통한 체제구조 변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여 근대적 정부 형태 --무늬만-- 를 갖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였지만, 남부는 통일전쟁 시기에도 귀족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가난한 소작농들을 지배하는 전근대적인 봉건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부유하고 공업화된 북부와 가난한 농업지대 남부의 대립은 현재도 극심한 [[지역감정]]을 유발하며, 아예 북부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지역주의 정당 "북부동맹"이 연립정권에 참여할 정도의 세력을 얻은 적도 있을 정도인데 그 당시에는 어땠겠는가? 남부인들은 이런 체제와 구속이 기본으로 배어있는 근대적 군사체제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반강제적인 통합으로 인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이탈리아 군대는 실질적인 전투 훈련보다 단일한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집체 훈련이나 분열 훈련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군대의식을 통해 [[이탈리아인]]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것이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각 지역별로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조직에 지역적 요소가 들어가다보니[* 비유하자면 이어지는 예에서 자주포포대는 한국인 부대, 전차중대는 일본인 부대에 속한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효율만을 이유로 이들의 지휘권을 쉽게 통합할 수 있을까?] 효율적인 조직 체계가 자리잡지 못했던 것. 예컨대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자주포포대가 전차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배속되었지만 지휘권은 개편하지 못해서 자주포포대와 전차중대는 단지 물리적으로만 가까웠을 뿐 각각 서로 다른 연대에 속해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당연히 상호 협력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전차 중대장이 '''바로 옆의 자주포 포대장'''한테 "지원 포격 좀!!" 이라고 직접 요청하면 '''절대 안 된다.''' 전차[[중대장]]이 [[대대장]]한테 "'''바로 옆'''의 자주포 포대에게 지원포격 좀 해달라고 해주세염!" 이라고 보고 때리면 대대장이 [[연대장]]한테 "우리 전차중대한테 '''바로 옆'''에 있는 자주포 포대가 지원포격 좀 해달라고 해주세염!" 전차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자주포 포대에게 전차 중대 지원포격하라고 해주세요" 사단장이 자주포 연대장한테 "당신네 자주포 포대한테 전차중대에게 지원포격 좀 하라고 하시게" 자주포 연대장은 대대장한테 "지원포격 해줘라" 대대장은 포대장한테 "지원포격 해" 포대장이 "포격 개시!!"(...)|| 이런 상태다보니 개별 부대가 아무리 열심히 싸우더라도 군 전체로서의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현대 한국군도 보병사단에 배속된 포병은 포병연대장 지휘 하에 있지만, 포병대대/포대와 보병연대/대대가 확실히 짝지어져 있으며 [[관측장교]]라는 편리한 --노예--존재가 있으므로, 보병 지휘관 입장에서 포병에 대한 지휘권은 없을 지 몰라도 화력지원이 필요할 때는 자기네 부대만을 전담마크 하는 포병에게서 바로 화력지원을 끌어올 수 있는데, 이탈리아군은 이런 조치가 전혀 없었다. 구태의연하고 관료주의에 절어있으며 자기의 특권만을 강조하는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쪽이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물론 장교들이 이런 꼴이니 안 그래도 부족한 병사들의 충성심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전차나 자주포, 전투기 등의 물질적 요소라도 잘 갖추고 있었던 것도 (당연히) 아니다. 무기의 성능과 수량 모두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무솔리니가 자존심 때문에 독일제 수랭식 엔진을 수입하(여 그걸 보면서 개발하)지 말고 독자개발을 고집하지 않나, 기껏 경쟁입찰로 그나마 나은 전투기를 골랐더니 피아트가 로비로 입찰에서 패배한 자사 시제품을 군이 정식 채택하게 만들지를 않나. [[G.50 프레치아]]가 대표적 사례. 게다가 최근 역사학계에서 1930년대 유럽 각지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과 2차 세계대전 각국의 경험을 통합적으로 분석하려는 학자들의 연구를 조합해서 보면 개전 당시 이탈리아 나라 꼴이 전쟁에 얼마나 준비가 안 돼있었는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당장 2차대전 본판이 터지기 전에 주축국의 국제적 어그로 행위들을 비교 분석하자면, 나치 독일에게 있어서 [[오스트리아 합병]]과 [[뮌헨 협정]]을 통한 주데텐란트,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은 결국 해당 국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나치스의 위신은 올려주며 실리적으로도 수준 높은 체코 군수 산업을 그대로 접수해 쏠쏠하게 써먹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본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는 생각보다 출혈이 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손실을 복구하지도 못한 채 바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고, 지원은 해 줘도 생색도 많이 내고, 독일 자체의 전쟁 준비력에는 결코 손실이 되지 않도록 퍼주었던 히틀러와 달리 무솔리니는 차후 프랑코 정권 아래 스페인에게 '''누가 지중해의 큰 형님인지 보여주기 위해''' 무려 '''9만명'''에 가까운 정규군을 파견하며, 당시 나라 예산의 20%에 가까웠던 '''8백만 리라'''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출처: Ian Walker 2003년작,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 에티오피아 전쟁에서만 하더라도 전사자 2만명을 포함한 이탈리아측 사상자도 20만에 가까웠던 생각보다 큰 희생이었고, 무엇보다 에티오피아 전쟁은 무솔리니 본인의 로마제국 부활 드립이라는 프로파간다적인 측면만 빼고 이탈리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스페인 내전에서의 개입은 2차대전 때 보여줄 졸전의 전주곡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반대편 공화진영에서 싸운 이탈리아 출신 반파시스트 제 12 국제 여단 가리발디 여단의용병들은 마드리드 공방전, 코루나 도로 회전, 아라곤 전선, 과달라하라 전투 등에서 종종 '''같은 이탈리아 출신 파시스트 CTV를 상대로''' 큰 전과를 세우며 국제여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부대들이라 칭송 받았다.] 국력과 군대를 보전하며 이 시기 나날히 발전하고 있었던 첨단 군사 기술과 군사적 인프라에 꾸준히 투자하면서 역량을 키워도 부족할 바인데 저런 아무런 이득도 없는 정치적 모험에 소중한 자원과 병력을 낭비했으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 헛일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같은 파시스트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이탈리아는 1940년 추축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부터 좌익, 반파시스트 성향이 강했던 토리노, 피렌체, 볼로냐 같은 북부와 중부의 공업도시들 위주로 대규모의 반전 여론과 전쟁 피로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전쟁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장성들도 어떻게 싸우란 말이냐!!' 라고 쌍욕을 하는데도 무솔리니가 억지로 밀어붙여서 전쟁을 벌이다 보니 졸전이 많은 거지 착실한 준비만 했으면 비웃음 당할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다만, 인구도 적고 산업능력상 한계도 뚜렷했다. 가끔 일뽕들이 일본보다 더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일본군은 이탈리아군과 비교할 거리가 많긴 하다. 두 나라 모두 통합되지 않은 조직력을 가지고 전쟁에 뛰어 들어갔다가 전쟁 치르는 국가 내부에서 손발이 안 맞아 말아먹은 게 심각했다는 것도 비슷하고.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군의 내부 분열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해군간 부서간 갈등]]이 심각한 반면 이탈리아는 부서간 마찰 차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졸전이 계속되면 될수록 파시스트 정권 자체에서 민간 사회와 국론이 이탈하는, 내부 분열의 정도가 전쟁 지도층 내부 수준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건 양쪽이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병림픽거리가 아니라 일제나 이탈리아나 사실 진지하게 국내 생산량, 경제력, 산업 규모 등을 냉엄하게 따지고 보면 영불독소미 당대 진짜 1티어 최강급 강대국들에 비해 현격하게 딸리는 객관적인 실력을 국민들에겐 어디 고위층 본인들도 안 믿는 천황 숭배, 파시즘 따위 이념으로 가려놓고 전쟁광 짓거리나 하다가 사이좋게 파멸한 도긴개긴으로 봐야 할 것이다. 굳이 이런 병림픽에서 우열을 가리자면 적어도 전체주의적 세뇌교육의 효과는 확실하게 본 일본이 아예 탈영, 항복, 가라전투를 밥 먹듯이 저지른 이탈리아보단 객관적으로 나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나마 이 군인 개개인 차원의 정신력 차원에서 당시 일본의 우위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선 도저히 제정신으로 옹호할 수 없는 가치관의 전체주의적 국민 세뇌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멀쩡한 일반적인 가치관에서 이걸 두고 더 긍정적이라 보긴 힘들다. 분야별로 따진다면 우선 규모는 일본군이 더 컸다. 감투정신은 따지고 보면 일본군이 더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은 사실 상대가 압도적인 수적, 질적 우위를 지닌 미군, 소련군, 중국군(양에 한정한다.)이 상대인 경우가 많았다. 후반에는 그랬고 전쟁 초반에도 그랬다. 그런데도 최소한 서전에서 이긴 적은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초반에 영국에 선전포고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을 열었을 때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지니고도 오히려 독일군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리비아를 상실할 뻔 했다. 군사 과학기술 측면에서 보면 총기는 두드러지는 격차는 찾기 어렵다. 전차는 이탈리아가 좀 더 나았고 항공기는 기초적인 기술은 이탈리아가 나았지만 실제로는 복엽기나 소량 생산하고 있었다. 나중에 가면 일본 제국이 역전하다시피 했다. 결정적으로 양이 적었다. 해군은 이탈리아, 일본 제국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본 해군이 전함의 보유 톤수, 항공모함의 보유 톤수 등 양적으로 우위였고 질적으로도 미국 해군력보다 낮았으면 낮았지 이탈리아 해군력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에서 주로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육지에서 출격하면 되었으므로 항모 수요가 떨어지는 점이다. 잠수함의 활약상이 더 괜찮았다는데 우위가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 일본 제국은 둘 다 전시 상층부의 능력이 매우 무능하다. 가령 무솔리니의 대책 없는 전쟁 도발, 전선 확대나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나 전쟁범죄가 거의 없다는 점[* 전쟁범죄도 전투에서 승리해야 저지를 수 있지 패배하면 그냥 패주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게다가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독가스를 쓰던 게 이탈리아군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쟁범죄를 저지를 의사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거 '선량하고 친절한 이탈리아군' 신화에 심각하게 가려져서 무시당하는 일이 너무 많은데 직접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토적, 민족적 야욕이 걸려 있었던 [[발칸 반도]]전선에서는 이탈리아도 독일군 못지 않게 막장짓 많이 하고 다녔다.] , 무솔리니가 전쟁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개념 지도자로 통한 점이나 시칠리아 함락 직후 재빠른 항복 정도가 그나마 쳐줄만할 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자국민을 의미없이 적군 앞에 고기 방패로 던져주는 것보단. 그리고 사실 이건 그래봤자 파시스트 전쟁광인 무솔리니를 그나마 개념 있다 없다로 치켜 세워줄 게 아니라, 파시스트 정권 자체가 이탈리아 국민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을만큼 깊게 파고들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1930년대 부터 쭈욱 이탈리아에는 활발한 반파시스트 운동이 벌어졌고, 그게 연합군 진주 이후로는 [[빨치산]] 투쟁이라는 이탈리아인들 자체의 독립적인 무장투쟁으로 결실을 본 반파시스트 이탈리아인들에게 공로를 돌려야한다. 그래도 병사 개개인이 '''여자'''라든지 '''자존심''' 등의 '''"싸워야만 할 이유"'''가 있을 때, '''유능한''' 지휘관이 있을 때라면 꽤 괜찮게 싸운 편이다. 독일군이 이탈리아군에 비해서 허접쓰레기로 취급받는 시절도 잠시지만 존재하기는 했다. 독일군의 확장이 시작된 지 겨우 3년차였던 오스트리아 합병 때가 좋은 예로 이때 [[안슐루스|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주]]는 갑작스레 이뤄졌기 때문에 행군계획 수립부터 시작해서 장비 정비 상태, 병참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이탈리아군 주재무관이 "우리보다도 형편없다"고 비판한 것이다.(특히 병사들의 행군 군기에 비판이 집중됐는데 이탈리아군도 어지간히 행군 군기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프랑스, 영국에서 위험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은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아돌프 히틀러도 무솔리니와 연대를 생각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지구 반대편의 [[마오쩌둥]]조차도 무솔리니를 ''''이 시대의 진정한 마키아벨리스트''''라며 히틀러나 [[히로히토]] 같은 다른 추축국의 지도자들보다 고평가하기도 하였다. 물론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군대가 축소된 후유증이었고 얼마 안 가서 이탈리아군과의 사이에 비교가 불가능해진다.[* 사실 좀 상태가 나았다는 1938년만 해도 독일군은 구 일본군과 동급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체계가 안 잡혀있어서 말아먹은 거지 개개인이 약한 병사인 것은 아니었고 정예부대는 매우 잘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것이 [[폴고레 공수사단]], [[베르살리에리]] 연대, [[아리에테#s-2|아리에테 기갑사단]], 알피니 산악사단 등이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파병된 조반니 메세 휘하[* 독일군은 이 사람을 이탈리아군 장군 중에서는 가장 쓸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동부전선에서의 활약을 인정해 철십자 훈장도 수여한 바 있다.]의 러시아 원정군단은 이탈리아군 제대 중에서는 잘싸운 이탈리아군 제대 중 가장 대규모로 평가받는다. 600명의 사보이아 근위기병연대는 2천 명의 소련군을 상대로 기병도를 들고 기병 돌격하여 [[소련]]군을 격파하는 대단한 [[http://flager8.egloos.com/2767657|기록]]을 세웠다.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전되었을 때 이탈리아 해군 특수부대가 마이알레라는 특수 어뢰를 타고 영국 지중해 함대의 모항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잠입, 폭탄을 설치해서 전함 발리언트와 퀸 엘리자베스를 대파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때 파손이 좀 더 컸다면 영국 해군은 '''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할 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군은 일부 특수전 부대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군대로 별 화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지중해 주변 국가 중 스페인과 더불어 항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정규 항공모함은 아니고 수직이착륙기를 운용하는 경항공모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통은 못 버렸는지 [[탈레반]]에게서 돈을 주고 평화를 샀다가 [[프랑스|애먼 국가]]가 피박을 쓰게 만드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냉전 시기엔 [[NATO]] 회원국으로 표면적으로는 동서 대립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 이탈리아군은 유사시 즉각 전선에서 대응하기 보다는 유럽의 내부 체제를 안정시키고 2선에서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은 [[러시아]]와 [[터키]]를 해상에서 막아내는 [[탱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군 자체의 전투력 문제보다는 이탈리아의 대내외 정치 상황에서 기인한다. 냉전 당시 이탈리아와 인접한 공산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따로 노는 국가들이라 전시 상황에도 직접 이탈리아군이 접경 지대에서 교전에 참가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반대로 이들 국가들이 이탈리아군과 군사적으로 충돌할 경우를 가정할 때도 이탈리아군이 직접 국경 지역에 배치될 가능성은 낮은 편이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이탈리아와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 해의 폭은 200km 내외라서 지리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고 만일 이들이 침공한다고 하면 당연하게도 아드리아 해의 넓은 해안선 때문에 이탈리아 본토 내에 주력 부대들이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였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사회당, 공산당 등 좌파 정당의 힘이 강한 편이었고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은 냉전 시절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좌파 정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군을 함부로 동원했다간 자칫 이탈리아의 정세가 안드로메다로 빠질 수도 있었다. 2004년에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