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역사 (문단 편집) ==== [[사르데냐]] ==== 오늘날에는 사르데냐도 남부 이탈리아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중세 이래 다른 남부 지역과는 공통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역사를 가졌기에 따로 서술한다. 사르데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부터 [[9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 혼란으로 인해 동로마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고, 그 틈을 노린 [[무슬림]] [[해적]]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사르데냐의 지방 세력이 자체적으로 약탈에 대응하기 위해 [[사병#s-2|사병]]을 조직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한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는데, 그들은 [[법관]]을 뜻하는 주디체(Giudice)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들의 영토는 주디카토(Giudicato)[* 복수형으로는 주디카티(Giudicati)라고 한다.]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아르보레아(Arborea), 갈루라(Gallura), 토레스(Torres)[* 로구도로(Logudoro) 주디카토라고 불리기도 한다.], [[칼리아리]] 등 4개의 주디카토는 사실상 독립 [[왕국]]이나 다름 없었기에, 해당 국가들은 왕국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13세기]]에 중부 이탈리아의 [[피사 공화국]]이 아르보레아 주디카토와 함께 칼리아리 주디카토를 분할한 것을 계기로, 피사 공화국과 그들의 [[라이벌]]인 [[제노바 공화국]]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까지 사르데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아라곤 왕국은 자국의 사르데냐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으로 명명하고 사르데냐 왕을 칭했는데, 피사와 제노바 세력을 축출하면서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420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주디카토인 아르보레아까지 정복하면서 사르데냐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사르데냐는 아라곤과 그 뒤를 이은 [[스페인 제국|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고, [[사국 동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가 [[사보이아 가문]]이 지배하던 [[시칠리아 왕국]]과 교환하면서[* 말이 교환이지 [[카를 6세]]가 국력을 앞세워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반쯤 협박해 강권한 것에 가깝다. 카를 6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나폴리 왕국]]을 얻었는데 나폴리 왕국과 붙어있는 시칠리아 왕국이 통치하기 훨씬 유리해보였기 때문.], 사르데냐는 사보이아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보이아 가문 출신 군주들은 사르데냐 국왕을 대표 칭호로 사용했지만,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토리노]]에 머물렀다. 애초에 처음 사르데냐 국왕을 칭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부터 사르데냐로 건너간 적이 없었다.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도 본토라 할 수 있는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롬바르디아]] 일부, [[사부아]], [[니스|니차]] 발전에 집중했지 사르데냐는 이 시기 거의 버려진 채 토착 귀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가 [[칼리아리 대학교]]와 [[사사리 대학교]] 발전에 힘쓰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에 본토를 상실한 사보이아 가문이 사르데냐로 [[몽진]]하면서, 사르데냐는 문자 그대로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실지를 회복하고 토리노로 복귀하면서 다시 [[지방(지리)#s-2|지방]]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아예 왕국 이름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바꾸면서 피에몬테가 중심지임을 대놓고 나타냈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 중 사보이아 가문이 처음 사르데냐로 오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동생 [[카를로 펠리체]]에게 사르데냐 [[부왕]]직을 맡기고 본인은 실지를 되찾으러 이탈리아 반도에서 대 프랑스 동맹에 열심히 참여하러 다녔는데 후진적인 사르데냐의 생활 풍습에 개탄한 카를로 펠리체는 형으로부터 양위받은 후 사르데냐의 근대화에 힘썼고 덕분에 사르데냐도 왕국 본토에 근접하게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이후 [[1847년]]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에 의해 기존에는 느슨한 [[동군연합]]에 불과했던 사보이아 가문의 영지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면서 사르데냐는 칼리아리 구, 누오로 구, 사사리 구로 나뉘었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하여 [[이탈리아 왕국]]으로 계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