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역사 (문단 편집) ==== 중부 이탈리아 ====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벌 이후 동로마 제국의 땅이었으나, 동로마로부터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라벤나 총독부]] 이외에 로마 공령(Duchy of Rome)의 공(Dux), 교황 등이 지배했다. 로마 주교인 교황과 로마 공이 병존하며 통치했지만, 교황의 권위가 날로 강해지면서 로마 공은 물론 라벤나 총독의 권위까지 위협했고, 여기에 [[성상파괴운동]]을 [[레오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등 이사우리아 왕조의 황제들이 강제하자 반 제국 감정이 일반시민, 사회지도층 모두에게 강해졌다. 성상파괴운동 이전에도 발칸반도의 상당부분이 슬라브인 및 불가리아에게,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이 랑고바르드에게 넘어감으로써 동로마령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 본국 사이의 교통 통신이 불편해져서 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가운데 더 확대되었던 언어 문화적 차이에 성상파괴운동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외에도 분명히 옛 본국이고 발상지였는데 그때 와서는 지방 속주 취급 받던 것과 ([[콘스탄스 2세]] 참조), 유스티니아누스 탈환 이후로 본래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독과점해오던 교황직 및 고위 사제직에 그리스어권 출신의 비중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이 기득권을 침해받았다고 느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_Papacy|영어 위키백과의 'Byzantine Papacy']] 문서에는 'Greek-speakers from Greece, Syria, and Sicily replaced members of the powerful Roman nobles in the papal chair during this period.'(그리스어권 출신자들이 로마 귀족들을 제치고 교황좌를 차지했다.), 'By the beginning of the eighth century, bilingual liturgies were common place, with Greek taking precedence.'(8세기 초에는 그리스어 및 라틴어 두 언어로 하는 전례가 일반적이었는데, 우선권은 그리스어에 있었다.), 'Greek was the language of choice during this period as countless Easterners rose through the ranks of the clergy. According to Ekonomou, between 701 and 750, "Greeks outnumbered Latins by nearly three and a half to one".'(수많은 동방출신들이 (교황청 내) 고위 사제직에 올라감에 따라, 이 시절 그리스어는 고급 언어였다.(choice에는 질 좋은, 고급의 라는 뜻도 있다.) Ekonomou에 따르면 8세기 전반에 (고위 사제직에서) 그리스인들(즉 동방 출신)이 라틴인(즉 서방 출신)을 거의 3.5:1로 압도했다고 한다.) 등의 대목이 있다.] 여하튼 당시 교황이던 [[자카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화답한 피핀 3세가 중부 이탈리아를 공격해서 [[라벤나]]를 점령하여 교황에게 바친다. 교황 [[자카리아]]는 마지막 동로마 제국 출신 교황이 되었다. 원래 라벤나는 동로마 제국의 총독부가 있던 곳이며[* 이탈리아의 동해안이라 발칸 반도의 로마 본국과 왕래가 쉬웠다.]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교황을 통제했는데 이 사건으로 동로마 제국은 중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중부 이탈리아와 유럽의 새로운 지배자인 프랑크 왕이 교황에게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중에 동로마 제국령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가문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대놓고 직접적으로 세력을 동원하여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이는 일도 불가능했다.[* 교황의 사주로 특정 국가가 다른 국가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많았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게 직접 쳐들어가는 것보다는 힘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대부분이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역사)|영지]]인 상태로 형식적으로만 교황의 통치를 받았다. 다만 교황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강력한 세력이 크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견줄 만한 세력이 성장하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교황들은 여러 수단을 써서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했으며,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로마와 볼로냐를 비롯해서 많은 지역이 [[교황령]]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했다. 교황령은 일종의 종교 특구라서 이탈리아가 통합되는 일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교황은 많은 권위를 가졌고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성장은 방해를 받았다. 게다가 교황은 국경을 넘어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에게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황령]]은 주변 국가들과의 이해 관계도 있었다. 이런 사람이 지배하는 지역이 통일 이탈리아라는 (강력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에 종속된다는 것은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등 가톨릭 국가 입장에서는 단순히 세력 구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일을 막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교황령은 완전한 의미의 세속 국가로 변하기는 어려웠다. 중부 이탈리아는 이런 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주변 국가를 포섭해야만 했다. 교황들은 어떻게든 프랑스를 이용해서 대항하는 것이 전부였고 다른 수단은 없었다. 결국 교황령이었던 중부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에 점령되었으며, 교황에게 남은 것은 [[바티칸 시국]]이 전부가 되었다. [[라테라노 조약]]으로 매듭지어지기 전의 상태를 [[바티칸 포로]]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