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퀄라이저 (문단 편집) == 역사 == 이퀄라이저의 역사는 [[전화]] 기술의 발전과정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전화가 막 보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외부에서 전기적 잡음이 추가되고, 고음은 점차 감쇠되어 통화 품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던 1915년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Ashley_Campbell|조지 애슐리 캠벨]]이 감쇠만 가능한 패시브 이퀄라이저의 일종인 Band-Pass 필터를 개발하면서 이퀄라이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1906년,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으로 유명한 그 플레밍이 발명한 진공관 발전 기술을 음향에 응용하여 Lee de Forest의 Audion을 시작으로 음향 신호를 증폭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에 따라 특정 주파수 대역의 증폭과 감쇠가 모두 가능한 액티브 이퀄라이저가 개발되고 상용화 되기 시작했다. 이퀄라이저의 발전은 영화의 발전과도 그 역사를 함께했다. 1920년대 말 헐리웃 영화 산업은 1927년의 재즈싱어를 시작으로 유성영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영화관에 음향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에게는 당연한 부분이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스크린과 함께 소리가 재생되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음향시스템이 없던 시절에도 소리의 재생 방법은 있었다. 배우는 직접 스크린을 보면서 싱크를 맞추어 연기했고 악단 역시 지휘자가 영상 싱크를 보면서 화면의 상황에 맞게 직접 연주를 지휘하는 등, 이런식으로 영화관 내부에서 실시간으로 연기,연주를 하면서 음향 시스템의 부재를 해결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은 영화관의 음향에 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영화관의 음향시스템은 엉망이었고, 당연히 관객들 또한 그런 부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존 보크만이라는 한 음향 엔지니어는 조정하고자 하는 주파수 대역을 변경하는 것이 가능한 최초의 '''가변형 이퀄라이저'''를 만들어 영화관의 음향시스템을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1940~50년대 초반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그러던 1950년대 말, Langevin, Cinema Engineering, Pultec 등의 회사들은 각각 존 보크만의 기술을 토대로 가변형 이퀄라이저들을 제작했다. 마침내, 이 시기에 최초의 상업적인 가변형 이퀄라이저인 '''Langevin EQ-251A'''가 출시되기에 이른다. 아래 사진의 모습처럼, 이 이퀄라이저는 노브를 이용해 저역대와 고역대의 주파수를 선택한 후, 슬라이더로 선택된 주파수 대역의 증폭과 감쇠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파일:EQ-251A.jpg|width=50%]] 그러나 EQ-251A 이퀄라이저에도 한계가 존재했다. 가변형 이퀄라이저이지만 사실상 선택할 수 있는 가변 주파수 대역들이 저음역대 2개, 고음역대 4개 정도로 제한적이기도 하며 선택한 하나의 주파수 대역 밖에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예 고정 주파수 대역 여러개를 한꺼번에 조절할 수 있는 그래픽 이퀄라이저가 출시된다. 대표적으로 아래 사진의 '''Cinema Engineering의 7080B'''가 있다. [[파일:7080B.jpg|width=60%]] 훗날 그래픽 이퀄라이저는 각각 10개, 20개, 30개의 주파수 대역을 조절할 수 있는 10밴드, 20밴드, 30밴드로 발전한다. 1962년 어느 날, C.P. Boner. Dr.s Boner[* 오늘날의 룸 어쿠스틱{공간의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왜곡현상(정재파 등)을 바로 잡는 것} 튜닝과 건축음향학의 발전에 이바지 한 인물이다]교수는,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공간에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정재파는 한 주파수 대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실험해보기 위해 특정한 주파수 대역의 소리만을 감소시킬 수 있는 새로운 Filter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정확히 설정한 주파수 대역의 소리만 레벨을 줄였을 뿐인데[* 원래 기존의 이퀄라이저들은 조정할 경우 설정한 주파수 이외의 다른 주파수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그가 설계한 이퀄라이저는 정확히 설정한 주파수에만 영향을 주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다.] 더 이상 방 안의 소리가 [[공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노치 필터'''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디지털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이퀄라이저의 대부분은 이 노치 필터를 탑재하고 있다. 1966년은 이퀄라이저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한 해였다. 바로 '''파라메트릭 이퀄라이저'''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조지 마센버그''', 대니얼 플릭킹어, 버지스 맥닐, 밥 뮤소의 4인방이었다. 당시 버지스 맥닐과 조지 마센버그는 3개의 주파수 대역을 독립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이퀄라이저를 레코딩 콘솔의 채널스트립에 장착할 것을 구상했다고 한다. [[재능충|놀랍게도 이걸 구상하고 개발할 당시의 그들은 겨우 고등학생이었다고...]] 그러던 1971년, 대니얼 플릭킹어는 위에서 설명했던 가변형 이퀄라이저인 Langevin EQ-251A의 한계였던 선택할 수 있는 가변 주파수 대역들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떠올리며, 조정하고 싶은 주파수를 사용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러한 형태의 가변형 이퀄라이저를 발명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Sweepable 이퀄라이저'''다. 아래 사진에 네모 박스에 점선 표시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파일:Sweepable EQ.png|width=55%]] 그리고 밥 뮤소는 그들의 아이디어대로 Q값[* 파라메트릭 이퀄라이저 항목에 설명되어있다.]이 고정된 주파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Sweepable 3밴드 파라메트릭 이퀄라이저를 만들어왔고, 그렇게 파라메트릭 이퀄라이저가 탄생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는 디지털 이퀄라이저들이 출시되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디지털 오디오의 선두주자였던 [[야마하]]가 세계 최초로 [[Digital Signal Processor|DSP]]를 기반으로 하는 '''Yamaha DEQ7''' 디지털 풀 파라메트릭 이퀄라이저를 출시했다. 그 후 1980년대 말에 들어서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에서 구동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이퀄라이저가 등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