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충희 (문단 편집) === 국제 대회에서의 이충희 === ||[[파일:external/www.sisainlive.com/19842_38981_347.jpg|width=100%]]||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1982년 아시안 게임]]에서 [[신선우]], 신동찬, [[박수교]]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30점을 올리면서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따는 데에 한몫했다. 이 금메달의 일등공신은 신선우였는데 신선우는 장신의 중공 센터진을 거의 홀로 초토화시켰고 영리한 플레이로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또한 팀에 신동찬, 박수교라는 리딩 가드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상대팀 진영까지 볼을 운반하는 것도 신선우였고 신선우가 박수교에게 공을 넘겨 주면 신선우가 다시 하이포스트에서 공을 건네받고 박수교, 이충희, 신동찬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지점에서 오픈 찬스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또한 중국의 무태추가 나오지 않았던 시기였어서 이길 수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전이었다.][* 당시 대표팀에는 현대와 삼성 선수들이 주축이었는데, 대표팀을 현대 감독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팀 내에서도 라이벌 관계가 형성돼 트러블이 많았다고 한다.] 아시안 게임 이후 1980년대 내내 장신 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국제대회에서 맹활약, 허재, 김현준, 김유택 등과 함께하며 1980년대의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선전하였다.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올린 45점[* 더 놀라운건 전반전 37점 중 36점을 혼자 득점했다는 점.]은 세계 대회 역대 7위 기록이고,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전패했지만 이충희는 평균 27점으로 팀 내 최고 득점을 올리며 자신의 역할을 했다. [[1988 서울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2미터 대 장신들을 앞에 두고도 슛을 넣으며 한 경기 30점을 넣기도 할 정도로 대활약을 했고, 대회 평균 22득점으로 팀 내 최고 득점을 하며 주포 역할을 해냈다.[* 상대팀이 수비를 헐겁게 했을 때에만 가능했던 득점이었다.] 특히 올림픽 경기는 이충희의 여타 경기들에 비해 보기가 쉽다 보니 2000년대 와서야 이충희의 올림픽 경기를 보고 경악한 농구팬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매번 좋은 활약을 한 것은 아니고 아시아 대회에서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게도 져 여러번 4강 탈락하기도 하였고, 서구권과 경기를 했을 때 역시도 잘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또한 키가 작고 파워와 운동 능력이 약하다보니 수비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데에 있어서도 한계가 뚜렷했고 장신숲을 뚫고 돌파 또한 불가능했다. 외부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이충희가 활약하던 시기의 국내 농구는 센터가 너무 활용되지 않았고 대부분 들러리나 서주는 장승같은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국제대회에 나가면 센터들이 힘을 못썼고 슈터들의 그날 활약상에 따라 경기 결과가 결정이 났다. 거기에 특정 스타들의 팀별 영향력, 출신 대학별 존재감 등이 탄탄하다보니 최상의 베스트5도 짜기 힘들었다. 고려대-연세대, 현대-삼성의 라이벌 구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충희, 김현준을 모두 비슷한 비중으로 써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난리가 났기 때문. 둘은 포지션이 같기 때문에 둘 중에 컨디션이 더 좋은 선수를 쓰면 되었고 나머지 자리에는 리딩 가드, 수비스페셜리트 등을 넣어서 밸런스를 맞추는게 더 강팀을 만들 수 있는 구성이었다. 장신 슈터도 아닌데 단순히 공격력만 믿고 둘을 동시에 중용하는 시스템으로 가다가는 괜스레 평균신장만 깎이고 수비에서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경기를 제외하곤 국제대회에서 두 선수는 기대만큼의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