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창훈(코미디언) (문단 편집) === 방송계 데뷔 이전 ===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중퇴 후 1975년 극단 '창조'에 입단하여 연극배우로 입문했다. 이후 극단 '76', '마당', '민중극단', '광장' 등지를 전전하며 천의 얼굴과 멋있는 목소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아 1986년 서울연극연출가그룹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최양락]]이 대학로에서 [[관객모독]] 한국 초연에 출연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초대 [[관객모독]] 같은 작품은 연극계에 전설의 레전드로 전해진다. 그래서 최양략이 당시 [[유머 1번지]], [[한바탕 웃음으로]] 등을 연출하고 있던 수 많은 [[코미디언]]들을 배출시킨 김웅래 PD에게 이창훈을 추천하였다. 김웅래 PD 또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라'는 작품)큰 감명을 받고 대학로 극장 앞 커피숍에서 매일 같이 이창훈과 만나서 "TV에 출연만 하면 넌 반드시 스타가 될 수 있다, TV출연만 승낙하면 주변 연극인들도 TV에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 등의 말을 하며 이창훈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이창훈은 당시에는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 연극인들도 같이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는 말에 TV 출연을 승낙하여 브라운관에 데뷔하게 된다. 이때 [[최양락]]이 그 소식을 듣고 엄청 반가워하며 곧장 이창훈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코미디를 가르쳤다고 한다. 물론 최양락이 이창훈보다 훨씬 어리고 이창훈은 최양락이 개그를 하기 전부터 쭉 [[연극]]을 하던 사람이었고 연극에서 웃긴 역할도 종종 했었다고 하니 개그를 가르쳤다기보다 TV 방송에 맞는 개그 연기를 알려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연극톤과 방송에서 쓰는 대사톤이 다르다보니 방송에 맞게끔 강약 조절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같은 연기로 분류되지만, TV에서 하는 연기와 무대에서 하는 연기 방식은 큰 차이가 있다. 무대 연기는 조명과 동선의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방송 연기는 카메라가 동선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쳐서 관객이 있는 공연 계열의 방송 개그 꽁트를 짜더라도 관객보다 카메라 워크를 고려하여 마지막에 웃긴 감정선이 크게 살아나게 짜야 해서 간단하지 않다. 이창훈 입장에서 성공한 방송 개그맨에게 배울 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연극에 종사하다가 브라운관에 데뷔해서 연극 특유의 과장된 톤과 발성을 고치지 못하고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꽤 많은데 대표적으로 데뷔 초기의 [[성동일]]이 있다. 다만, 이창훈은 관객이 없고 조용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드라마나 영화출연과 달리 관객들을 앞에두고 콩트를 하는 개그 방식이라 적응이 빨랐다. 그만큼 관객들 앞에 두고 공연을 하는게 익숙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활약할 수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