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진호(1867) (문단 편집) === 관직 생활 ===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통역관 양성소에서 [[영어]]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1882년]] [[무과]]에 급제했다. [[1888년]] 군사 학교인 [[연무공원]]을 졸업하고, [[무관]]으로 근무했다. [[영어]]에 능숙해 연무공원 [[미국인]] 교관 다이(Dye)의 신임을 얻었고, [[친미파]] 관료로 평가받았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교도중대[* 이 부대는 일본군의 특수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를 이끌고 난 진압에 참전한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다시 [[친일파]] 정권이 성립하자 [[1895년]] 다이와 임최수, [[이도철]],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 등이 친일 내각을 전복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고, 이진호도 이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변심해 이 계획을 [[탁지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며 춘생문 사건을 실패로 끝냈고, 이때부터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석달 후, [[이범진]]과 [[이완용]], [[이윤용(1855)|이윤용]]에 의해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 구연수 등의 [[친일파]]들과 일본 대사관을 거쳐 [[일본]]으로 피신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왕명으로 이진호를 비롯해 유길준, [[조희연(1856)|조희연]],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5일]] 유길준, 이진호 등에 대한 참수명령을 내려졌다. 망명 이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했던 [[우범선]]이 암살당했고 이후에도 일본으로 망명한 이진호와 유길준, [[박영효]] 등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그래서 그는 변장하며 일본 도쿄 내에서도 [[조선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은신해 생활했다. 이후에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망명한 친일파 인사들을 [[조선]]으로 송환해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1904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 차례로 이진호, [[영선군|영선군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1862)|이규완]], [[유길준]], [[조희연(1856)|조희연]], [[장박]](장석주), [[이범래]],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일본]]은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지키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 공사관에 이진호 등을 비롯한 14인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또다시 거절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직후 귀국해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 등에 임명되었다.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