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중진 (문단 편집) === 반란과 최후 ===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나 조광윤이 장군들의 추대를 받고 시종훈에게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북송을 건국하니 이가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였다. 태조는 [[한령곤]]을 시위마보군도지휘사로 삼아 이중진을 대신하게 했고 이중진에게 중서령을 더했으며, 뒤이어 청주(靑州)로 옮겼다. 이중진은 조광윤과 더불어 본래 후주 조정을 함께 섬기고 병권을 나눠 가졌지만 항상 조광윤을 꺼렸는데, 태조가 즉위하고 또한 자신이 청주로 가게 되자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태조는 이중진의 마음이 불안하다는 걸 알고 육택사(六宅使) 진사회(陳思誨)를 이중진에게 보내 [[단서철권]]을 내리며 이중진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이중진은 진사회와 함께 입조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의견에 휘둘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가 자신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진사회를 유폐한 뒤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적수순(翟守珣)을 노주(潞州)로 파견하여 똑같이 북송 조정에 불만을 품은 [[이균]]과 접촉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를 잘 알고 있던 적수순은 몰래 추밀승지(樞密承旨) [[이처운]]에게 태조와의 회견을 주청했고 이때 태조와 적수순 사이에 다음의 문답이 오갔다. >태조: 내가 이중진에게 철권을 내리려고 했는데, 그는 짐을 믿었소? >적수순: 이중진은 폐하께 귀순할 뜻이 끝내 없어서 폐하를 믿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적수순에게 후한 상을 내린 뒤 작위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또한 이중진에게는 거사를 늦추리고 권했다. 이는 이중진이 이균에게 호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태조의 조치였으며, 이균을 진압할 군대와 이중진을 진압할 군대를 나눠서 보냈다. 적수순이 돌아와서 이중진에게 위력을 키우고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되 경망하게 군대를 일으키지 말라고 권하자, 이중진은 적수순의 말을 덥석 믿었다. 또한 [[남당]]의 [[이경]]과 몰래 연락을 취했는데, 이경이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사실을 북송에 알렸다. 이중진의 감군(監軍)이었던 안우규(安友規)는 항상 이중진으로부터 시기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의 측근 몇 명과 함께 탈출하여 저주자사(滁州刺史)로 임명되고 전군을 감호하였다. 이중진은 자신을 따르지 않은 군교 수십 명을 모두 죽였다. 태조는 [[석수신]], [[왕심기]], 이처운, [[송악(북송)|송악]]을 파견하여 금병을 거느리며 이중진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이때 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주나라의 옛 신하들에게 시기와 이간을 받은 적이 없지만 이중진은 짐의 마음을 따르지 않았고 스스로 반역할 마음을 품었소. 지금 육사(六師)가 바깥에 있으니 잠깐 가서 이중진을 위무하겠소. 태조가 이중진에 대한 친정을 결심하고 대의진(大儀鎭)에 이를 때 석수신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이중진이 머지않아 패배할 것이니 폐하께서 직접 보시길 바란다고 알렸다. 그리고 태조가 도착한 바로 그날 이중진이 패배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중진의 부하들은 이중진에게 진사회를 죽이라고 권유했으나 이중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온 일족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하는데 진사회를 죽인다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이중진은 결국 스스로 불을 놓아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고 진사회 역시 이중진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중진의 형인 심주자사(深州刺史) 이중흥(李重興)은 이중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으며, 아우인 해주자사(解州刺史) 이중찬(李重讚)과 아들인 상식사(尙食使) 이연복(李延福)은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