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중섭 (문단 편집) === 가족 이별 === 1952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의 부고를 접하여 6월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원래는 아내에게 장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당시 아내는 심한 [[영양실조]]로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는 중증 환자로, 건강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여서 이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아서 더 건강이 나빠질 것도 우려했고, 또한 설령 알았다고 해도 곧바로 일본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어찌어찌해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렇게 아들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 장인이 작고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으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겨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전쟁 중이던 당시 한국에는 한국인 배우자를 따라 남아 있다가, 배우자가 전사/행방불명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인들이 꽤 많이 있었다. 반대로 일본에는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뒤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해야 할 한국인들이 제법 있었다. 이들을 맞귀국시키기 위해 일본 측에서는 송환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사코는 우선 부산 초량동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7월 경에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이중섭까지 온 가족이 함께 도일하려 하였으나, 당시에는 해방 후 한일간 국교 단절이 이어져 정상적인 인적 교류가 매우 어려웠기에[*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당한 배경과 재력이 있어야 했다.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와 [[이창희(기업인)|이창희]]는 1952년에 병역을 피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중섭은 동행할 수가 없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 때부터 가족의 재회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섭은 그림을 열심히 그려 이를 팔아 일본으로 건너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해 7월엔 친구 [[구상(시인)|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를 정기적으로 제작했다. 12월엔 <제1회 기조전>에 출품했다. 1953년 5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출품했다.[* 일본 유학파 화가들인 [[김환기]]·유영국·이규상·[[장욱진]]이 결성. 신사실파(新寫實派)는 1948년 12월에 창립전, 1949년에 2회 전시회를 연 이후, 1953년 부산에서 이 3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재회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부부는 치명적인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204163|사기]]에 휘말리게 된다.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로 마영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은(시인)|고은]]의 평전에서는 마영일이 부산 광복동에서 서점을 경영했다고 하고 있고, 최석태의 《이중섭 평전》에서는 통운회사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마영일이 일본에 있던 마사코를 찾아와서는 일본서적 무역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여전히 낙후된 한국에서는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과 지식에 대한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서적을 한국에 들여와 팔면 제법 돈이 되었다. 마영일은 마사코가 일본에서 책을 사서 본인에게 부쳐주면, 본인이 그걸 한국에서 팔아 구입 원금은 마사코에게 부쳐주고 이익금의 일부는 한국에 있던 이중섭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에 솔깃한 마사코는 마영일의 말대로 도쿄 대학가에서 서점을 하던 친구에게 약속어음을 써주고 5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이때는 마영일이 약속대로 원금은 마사코에서 보내주고, 이익금 일부를 이중섭에게 나눠줬다. 안심한 마사코는 그 다음에는 무려 27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영일이 원금도, 이익금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마영일로부터 8만엔 정도를 돌려받은 것으로 보이나 결국 20만엔 가량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돈을 벌기는 커녕 빚을 갚기 위해 마사코도 20년 이상을 삯바느질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시인)|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마사코의 어머니(장모)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친분이 있던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해 주었다고…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이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이들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