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중섭 (문단 편집) === 한국 전쟁 ===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 [[원산시|원산]], [[평양시|평양]], [[남포시|남포]] 등은 당시 [[유엔군사령부|UN군]]의 표적 1순위였다. 한 미군 [[장교]]는 "원산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산에서 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12월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 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 이러다보니 [[박수근]]과 함께 가장 [[위작]]이 많은 [[한국]] 화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고,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이중섭의 절친이었던 화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1675|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이렇게 이남덕이 고생하는 광경을 보고 이중섭이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1/20/AHGT4VYA2FGCBCWIINMCB63J3I/|#]]]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4.6㎡, 1.4평) 한 칸을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그래도 몹시 춥고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광역시|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 사실 제주라고 해서 그리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전쟁의 참화에서는 한 발짝 벗어나 있었지만, [[4.3 사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8년 시작된 4.3사건은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치다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의 개전과 함께 대대적인 예비 검속이 발동되었고, "산폭도"로 유배되어 있거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10월엔 대한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콩지팟지'의 무대장치-소품제작에 참여하는 소일거리를 얻기도 한다. 이 당시 이중섭이 기거하던 정방동의 송태주·김순복 부부의 집과 방은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ONT_000000000500508#|이중섭거주지]]'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집이 옛 모습을 잃었다가, 1997년에 1950년대의 원형대로 복원했다. 집 안주인 김순복은 마사코와 동갑으로, 최근까지도 이 집을 지키고 살았다.], 그 뒤에는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개관했다.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