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중섭 (문단 편집) === 공산 치하 ===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해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고충이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사상적으로 표면적 압박을 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큰 사건이래 봐야 친구 구상이 참여한 시집 "응향"에 그림을 그렸다가 시집이 사상적으로 비판받자(구상은 이 일로 일찍 월남한다) 심문받은 일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문초를 겪기는 했으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8월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에 가입해 연합군 환영을 위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국가 원수 대형 초상화와 국기를 그리는 일에 참여했다. 9월엔 김영주와 원산미술협회를 결성했다. 11월에 [[롯데미도파|미도파백화점]]의 지하실 벽화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1946년 1월엔 이쾌대가 신미술가협회를 확대시킨 독립미술협회에 가입했다. 3월엔 북조선예술동맹 산하 원산미술동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해 봄에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 비통함을 승화시켜 8월 광복절 기념 평양에서 열린 <제1회 해방기념종합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날으는 어린이'를 출품한다. 1947년, <제1차 전국미술전람회>(평양)에 출품했다. 1947년,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9년,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원산 근처의 송도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 등을 많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