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중섭 (문단 편집) === 전쟁 말기 === 1942년,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한신태양사에서 '제4회 태양상(조선예술상 개칭)'을 수여한다. 이 해 전람회 준비를 위해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고[* 당시 태평양전쟁이 확전될 시기라 징병제를 시행했던 탓도 있다.] 원산에 계속 체류했다. 1944년 12월,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를 조선에 불러온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타고 [[부산광역시|부산]]과 [[서울특별시|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올 수 있었다. 이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총후 화가[* [[일본 제국|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를 뜻한다.]로 일한 [[흑역사]]가 있다. 물론 원해서 그런건 아니고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형 이중석[* 당시 상당한 [[권력]]자였으며 6.25 전쟁 당시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꼴을 당했다.]이 일부러 총후 화가로 만든 것이었다.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중섭마사코.jpg|width=100%]]}}} || ||<#ddd> '''둘의 결혼식 사진'''[* 보다시피, 사모관대[* 사모관대(紗帽冠帶)는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옷이다. 신라시대부터 당나라 관복을 모방하여 관복으로 사용하였다. 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었으며, 네모진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였다. 허리띠는 조복의 대와 같고 흰색 버선에 협금화를 신었다. 지금은 결혼식 폐백을 드릴 때나 전통혼례를 할 때 신랑이 입는다.]에 족두리를 쓰고 [[전통]] [[혼례]]를 올렸는데, 서양식 결혼식이 흔해지기 시작했던 당시로도 이미 드문 일이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