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중섭 (문단 편집) === 2000년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중섭유족.jpg|width=100%]]}}} || ||<#ddd,#000> '''왼쪽이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 오른쪽이 삼남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 || 2002년 11월, 서귀포시가 이중섭전시관을 개관했다. 그러나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 형편상 유화 진품은 1점도 소장하지 못한 채 개관했다. 2003년 3월,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이 기증한 8점을 필두로 점차 이중섭의 작품이 뒤늦게나마 들어왔고, 2종 미술관이 되어 이름이 '이중섭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 2004년엔 1종 미술관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3월 16일, 이중섭의 삼남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가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 가짜로 밝혀져서 파장이 일어났다. 이씨가 한국고서 연구회 고문 김용수와 함께 공모해 사기를 친 것.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324285&plink=OLDURL|#]] 이를 기점으로 이중섭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이 생겨났다. 한국미술품평가원에 따르면 이중섭이 위작이 가장 많은 작가라고 한다. 187건의 감정 중 무려 108건이 위작이고 진작은 77건, 감정 불능 2건이었다. 의뢰된 작품의 58%가 가짜였던 셈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52152475&code=960202|#]] 이태성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가짜라고 주장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관계자들을 고소하기도 했으나, 과학 감정에서 들통나고 말았다. 물감에 들어간 티타늄과 규소 성분을 찾아낸 X선 형광 분석기 확인, 현미경 관찰, 적외선 촬영 등을 활용한 과학감정 결과 '이중섭의 그림에는 펄 물감이 사용된 적이 없는데 위작은 펄 물감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하며 사용된 종이도 그 시절이 아닌 최근에 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위작은 모두 압수되어 폐기되었고, 일본 국적의 이태성씨는 현재 '기소유예' 상태로 사실상 한국 입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림편지 같은 작품 때문에 이중섭의 작품세계와 불가분한 인물이기도 하고, 202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기증하는 등 주요 인물 대접은 받는 듯하다. 2006년, 이중섭의 그림 '황소'가 35억~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2018년 47억원에 낙찰되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421928|#]] 이후 2021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기증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2007년, 나희덕 시인이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의 자택과 미술관을 들러 구경한 뒤에 그에 대한 시를 썼다. 이중섭이 살아 생전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가족의 가난하고도 행복했던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한편 그의 작품에 대한 묘사도 절묘하게 섞여 들어가 있다. 참고로 나희덕 시인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어서 그림과 화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본 작품은 2022학년도 EBS 수능특강 문학 연계교재에 실린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우리가 오늘날 이중섭 자택이라 아는 것은 사실 그 마을 촌장 댁이고, 그중 맨 오른쪽에 있는 '''창고방 하나만이''' 이중섭 가족이 얹혀 산, 진정한 그의 자택이다.]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윗 문단에 나오다시피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마사코와 서로를 부르던 애칭이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 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 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게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작품의 묘사이다. 참고로 현재까지 알려진 이중섭의 작품 중 가장 큰 것이다.] >[[한국전쟁|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이중섭이 서귀포 자택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시의 제목도 여기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이중섭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를 가리킨다. 사실 이 작품은 이중섭이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으로 죽어가며 그렸던 작품이다.]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둘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4개월에 불과했다.]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 > —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