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준(열사) (문단 편집) == 여담 == * 이준이 [[만국평화회의|헤이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갈 때, [[뉴욕]]에서 [[이승만]]을 만나고 싶다고 그에게 [[전보]]를 보내었다. 유학 중이던 이승만은 급히 뉴욕으로 출타하여 그를 만나 조국의 앞날과 국제 정세에 관해 의논하며 며칠동안 세계 평화 재판소에 탄원할 호소문을 함께 작성하였다.[*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99] * [[서울대학교 로스쿨]]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자랑하는 선배 중 1명. 법관양성소의 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와 합쳐져서 서울법대가 되었고 서울법대가 서울대학교 로스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도 서울대학교 로스쿨 건물 정면에 이준 열사 전신상이 서 있다. *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는 항일 열사이기도 한데 장남인 이용(본명 이종승)이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다가 월북해 북한 [[내각]]에서 도시건설상(남한의 [[국토교통부 장관]]), 사법상(남한의 [[법무부 장관]]) 등의 요직을 지냈기 때문인 듯.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이준의 가묘가 있으며 이용 역시 여기에 안장되었다. 2000년 당시 장증손 이일(당시 44세)이 북청에 거주하고 있었다.[* 출처 : 북녘땅 고향은 지금 북청편, KBS 2000년 9월 11일 방영] 차녀 이종숙은 1959년 당시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살고 있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9112300209103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11-23&officeId=00020&pageNo=3&printNo=11553&publishType=00010|#]] * 이준 열사가 순국한 헤이그에는 당시 특사단의 숙소였던 드융 [[호텔]]이 있는데 1995년 이기항 씨가 약 20만 달러를 지불하고 호텔을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개장해 '이준 평화 박물관(YI JUN PEACE MUSEUM)'으로 이름 붙였으며 1995년 8월 5일 개관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본 박물관에는 이기항 씨 부부가 일본, 러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수집한 관련 유물과 [[광복절]] 60주년 제1호 [[태극기]]가 소장되어 있다. 박덕영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이준 열사 기념 [[우표]]를 기증하였다. * 헤이그 특사 일원 중 유일하게 묘소가 제대로 남아 있다. 이상설은 러시아에서 사망 후 동지들이 화장하여 산골했고, 이위종은 생사 자체가 불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