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호(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이종호는 [[1885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이용익|이용익(李容翊)]]의 손자이자 이현재(李賢在)[* 이현재는 이용익의 형인 이연익(李然益)의 둘째 아들로 이용익의 양자였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에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이용익|할아버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제2대 교주(校主)가 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일제]]의 [[한국통감부]][*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면서 [[한성부]]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사(政事) 및 행정 등을 장악하며 직접 통치하도록 일제에 의해 설치된 기관이다.]는 [[학부]]를 통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일제 산하로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통감부는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었다.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통감부의 지속적인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종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통감부는 [[안중근]]사건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이종호를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붙잡기도 하였다. [[1907년]] 1월에는 [[이준(열사)]], [[이동휘]] 등 [[함경도]]의 유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를 설치하여 소학교 교원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한북흥학회가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학회로 개칭하면서 두 학회가 경영하던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종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밖에도 강화 보창학교와 청주 보성학교 등을 사재로 경영하고, [[안창호]]를 도와서 평양 [[대성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인쇄소 보성사[* 충숙공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 근처에 세운 인쇄사로,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다.]를 통하여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의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근대교육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보성전문을 비롯한 보성학교의 경영을 인수자인 [[천도교]]의 [[손병희]]에게 인계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소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 하자, 이종호는 [[1911년]] 이른 봄 이갑과 함께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여 [[안창호]]·[[유동열]] 등과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하였다. 한동안 중국에 머물다가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고, [[이상설]]·[[김립(1880)|김립]]·김도여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교육을 위하여 4개처에 한민학교(韓民學校) 등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갔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귀국, 고향인 [[명천]]에서 1년간 거주제한을 받았다. [[1918년]]에 상경하여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