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욱(의료인) (문단 편집) == 생애 == [[1945년]] 4월 12일 경기도 경성부(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나 서울 [[경복고등학교]],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26살의 나이로 다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동 대학원의 산업공학 및 미 하와이 주립대학교 대학원(전염병학)에서 석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경기 안양시 나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봉사를 하였으며, 이 시절 부인인 일본인 카부라키 레이코(鏑木 玲子) 여사[*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페루 카라바이유 등에서 활발하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부부 사이에는 외동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이충호(일본 이름은 카부라키 타다히로)이며,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와 만나 결혼했다. 1976년 대학 졸업 후 부부가 함께 태평양 피지로 가 빈곤환자에 대한 봉사활동을 시작, 1983년에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나병퇴치팀장으로 근무하면서부터 WHO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때의 봉사로 '아시아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질병예방관리국장, 예방백신사업국장, 정보화담당팀장 등을 거쳐 [[결핵]]관리국장으로 있으면서 2003년 1월 말 7차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마침내 2003년 1월 28일 벨기에 출신의 피터 피오트 유엔 에이즈퇴치계획 사무국장을 2표 차로 물리치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6대 WHO 사무총장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30128/7907003/1|#]] 한국인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의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은 이종욱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때 뿌려진 씨앗은 2006년 [[반기문]]이 [[UN 사무총장]]으로 당선되는 것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취임 당시 연설은 아래와 같다. > "We must do the right things > We must do them in the right places > And we must do them right ways" >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이미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 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는 결국 2020년 8월 25일, 마지막까지 소아마비가 퇴치되지 않았던 아프리카에서 소아마비 종식선언을 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무총장에 취임할 당시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주변은 실현되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는데, 이에 대한 그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 듯한 핑계가 생기지.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만 하다간 아무것도 못 해. 옳은 일만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결국은 우려대로 100만 명에게만 보급하고 나머지 200만 명에게는 보급하지 못했다. 당초 계획의 절반에도 미달한 것이었고, 외견상 '실패'라고 평가해도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한 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지.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는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무엇보다도 그 '실패'의 결과로 100만 명에게 에이즈 치료제를 보급하는데 ''''성공''''하였고 아프리카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였다. 어려운 목표라고 시도조차 안 했다면 단 한 명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연 30만km를 비행하며 150일을 출장다녔지만 비행기는 항상 2등석 이용에 수행원은 2명만 데리고 다녔다.[* 당시 세계 유력 국제기구의 수장임에도 직접 캐리어를 끌고다닌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자기 집도 없었으며, 전용차는 [[토요타 프리우스]] 2세대였다.[* 앞서 개인적으로 장만한 차도 있었는데, 이 차량은 유럽에서 중고로 구매했던 것이었다. 나중에는 고장나서 버렸다는 후문.] 차에 대한 말은 이랬다. >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WHO사무총장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리고 스위스나 유럽에서는 내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사무총장이나 직원 누구라도 차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능력으로 승부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렇게 소박한 생활을 한 것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 2004년 조류독감 확산 방지, 소아마비와 결핵예방, 흡연규제 등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아 [[타임(주간지)|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꿈이 있고 열정이 있는 젊은이를 좋아했던 그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그리고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좁은 애국심 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군다나 열정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러한 성과와 행보들을 통해 그는 전 세계로부터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이후에도 에이즈 퇴치사업, 조류인플루엔자 확산방지사업 등 주로 소외되고 가난한 저개발국 질병을 예방하는 데 헌신하던 중, 2006년 사무총장 재직 3년째에 과로에 의한 뇌출혈로 쓰러져 스위스 제네바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61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유해 귀국 전 현지에서 [[화장(장례)|화장]] 절차를 거쳐 현재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