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린(1883) (문단 편집) == 생애 == 1883년 2월 12일 [[충청도]] [[서산군]] [[지곡면]] 율곡리(現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율리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이교칠(李敎七, 1832. 4. 25 ~ 1887. 6. 24)과 어머니 [[전주 이씨]](1851. 9. 9 ~ 1908. 11. 14)[* 이회원(李會鵷)의 딸이다.]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첫째 작은아버지 이교삼(李敎三, 1828. 2. 4 ~ 1868. 4. 8)에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 서산군 [[정미면]](現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 199번지로 이주해 [[http://db.history.go.kr/id/ia_4255_3306|본적을 두었고]], 승산리 109번지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79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982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거주하기도 했다]].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관훈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http://db.history.go.kr/id/ia_4255_3306|109번지]]와 177번지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463&evntdowngbn=Y&indpnId=000000760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거주했다]]. 6살 되던 1888년부터 혜사(蕙史) 최현구(崔賢九)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상경했고, 1907년([[순종(조선)|순종]] 1) 10월 3일 [[성균관]] 사업(司業)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1_10A_03A_00030_2015_001_XML|임명되었으나]] 이튿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1_10A_04A_00040_2015_001_XML|사직했다]]. 이후 32촌 지간의 족형(族兄) [[이종일]]이 경영하던 『[[제국신문]]』의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고, 『대한협회회보』 편집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1909년 [[대한민보]]가 창간되자 논설기자 및 주필로 재직하기도 했다.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822|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의 주필 및 발행인, 편집원 등으로 활동했다. 1919년 2월 28일 이종일로부터 [[조선독립신문]] 창간호의 원고를 집필하도록 지시를 받았고, 원고를 완성한 뒤 보성사(普成社)의 인쇄 공장 감독 [[김홍규(독립운동가)|김홍규]]에 전달했다. 창간호가 간행된 뒤, 이날 오후 6시에 조선독립신문 발행인 [[윤익선]]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자 그날 밤 경성서적조합 서기로 근무하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264|장종건]](張悰鍵)[* 張'''{{{+1 倧}}}'''鍵이라고도 한다.]과 의논해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했고, 3월 2일 간행비용으로 20원을 장종건에게 납부했다. 그리고 경성부 관훈동 경성서적조합에서 조선독립신문 제2호, 제3호, 제4호를 지하신문 형태로 차례차례 발행했으나, 곧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3월 10일 조선독립신문 원고 및 등사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자신도 [[http://www.chondogyo.or.kr/niabbs4/bbs.php?bbstable=sungj&call=read&page=1&no=94&categori11=3.1%BF%EE%B5%BF%C0%AF%C0%FB%C1%F6|체포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463&evntdowngbn=Y&indpnId=000000760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79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982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6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71&evntId=0034972202&evntdowngbn=Y&indpnId=000000455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는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종린(1919년).jpg|width=100%]]}}} || ||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21년 5월 27일 [[http://db.history.go.kr/id/ia_4255_3306|만기출옥한 뒤]] 1923년 1월 9일 경성부에서 [[백관수]] 등과 함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21|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월 20일 개최된 발기총회에서 창립준비위원에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3100&code=kc_age_40|선출되었다]]. 이어 1월 23일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이사에 선출되었고, 이후 이사장까지 역임했다. 1926년 3월 4, 5일에 [[조선공산당|제2차 조선공산당]] 당수 [[강달룡]]이 민족유일당 결성을 목적으로 자신을 방문하자 민우회(民友會)를 중심으로 민족적 대동단결을 이룰 것을 주장했다. 이후 [[권동진]]·강달룡·[[신석우]]·[[안재홍]]·[[유억겸]] 등과 민우회를 창설해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또한 그해 4월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천도교청년동맹이 조직되자 고문에 취임했고, 이를 중심으로 천도교 구파의 영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513|박인호]](朴寅浩) 등과 함께 [[6.10 만세 운동]]을 추진했다. 1927년 1월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창립 당시 간사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후 본부 선전부장, 경성지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던 중 1929년 [[허헌]]·홍명희·[[이관용(독립운동가)|이관용]]·[[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794|이원혁]](李源赫)·[[조병옥]]·[[주요한]]·손재기(孫在基)·[[한용운]]·김무삼(金武森)·[[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504|김항규]](金恒圭)·[[권동진]] 등과 함께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해 결의문을 발표하고 민중대회를 일으키려고 계획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제국 경찰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91214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1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3350&publishType=00020|체포돼]] 구금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종린(1929년).png|width=100%]]}}} || || 1929년 12월 21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1930년에는 신간회 민중대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31년 10월 조선물산장려회의 기관지 『실생활』의 사장에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3100&code=kc_age_40|취임했다]]. 1932년 12월 22일 천도교 구파 중앙교회 현기관장(玄機觀長)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2122600209202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2-12-26&officeId=00020&pageNo=2&printNo=4320&publishType=00020|임명되었고]], 1938년 4월 4일 천도교 구파 교인대회에서 제4대 박인호 교주가 고령을 이유로 퇴임함에 따라, 천도교 교단에서는 기존의 교주제를 폐지하고 대종사장제로 바꾸었다. 이때 대종사장(大宗司長)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40500209102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8-04-05&officeId=00020&pageNo=2&printNo=5966&publishType=00010|취임해]] [[손병희]]·박인호 이후의 천도교 교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들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했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상무이사 등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도교 측 대표위원으로 참여하여 [[태평양 전쟁]]에 조선인 [[학병]] 참여를 격려하는 강연을 하는 등 [[http://aks.ai/GC04100877|일제에 적극 협력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서산시|서산군]]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경력으로 인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방해 공작으로 풀려났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민구락부]]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951년 9월 1일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종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2004년 2월 고향인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안견기념관 앞 공원에 황산 이종린 문학기념비가 건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