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구(군인) (문단 편집) === 노태우 정부 시절: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 [[노태우 정부]] 출범 후 1988년 6월 이종구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직에 오르면서 육군의 정점에 서게 되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군사 정권에서 실세라 할 수 있는 자리는 모두 꿰차며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것이었다.[* 군사 정권에서 최고 실세 보직인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인물은 한국군 [[역사]]상 이종구가 유일하며 지나친 [[권력]]을 갖게 될 것에 대한 견제를 위한 암묵적인 방침인데 이것을 깨뜨린 유일한 인물이다. [[선배]] 노태우가 수경사령관, 기무사령관까지는 모두 지냈는데 육군참모총장까지 맡을 경우 너무 힘이 쏠릴 것을 염려한 전두환계의 견제를 받아 반강제로 예편한 바 있다.] 이 때 이종구처럼 전두환계 하나회 군맥의 핵심들로 꼽히는 12기 선두주자 [[박희도]]나 13기 선두주자 [[최세창]]이 노태우 집권 이후 전두환계 군맥 정리를 위해 숙청당할 때도[* 하지만 최세창도 퇴임 후가 걱정되던 노태우에게 부름을 받아서 노태우 정부 말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으로 [[금의환향]]한다.] 이종구는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에 연거푸 오르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노태우가 자신의 직계들을 [[중용]]하기 위해 탈하나회를 내걸었지만 결국 하나회에 기반한 정권이기 때문에 하나회를 버릴 수 없었던 노태우 입장에서 조직의 핵심이며 영남 군맥의 [[보스]]인 이종구까지 숙청하는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직계였지만 노태우의 [[경북고등학교]] [[후배]]였던 이종구는 노태우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노태우는 마찬가지로 전두환계 하나회 군맥의 중간 보스인 [[김진영(군인)|김진영]]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는 참모총장으로서 자신의 막강한 권한을 앞세워 예산이 들어가는 많은 사업들을 추진해 성공시켰다.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기 이전부터 조짐이 보였는데 사단장 시절에는 [[제20기계화보병사단|20사단]]을 기계화 부대로 개편의 기초를 다졌으며, 군단장 시절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했다. 그리고 야전군사령관 시절에는 약체화되어 있던 [[제2작전사령부]]에 후방 [[군단]] 2개[* 그러나 후방에 군단을 2개씩이나 두는 것은 실용성이 적다는 비판을 받았고 2000년대 이후 국방 [[개혁]]의 일환으로 [[제9군단]]과 [[제11군단]]은 해체되었다.]를 창설했다. 또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에 오른 이후에는 [[방위]]병 [[월급]]제를 도입했으며 육군본부에 밀리던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합참]]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했다. 이처럼 군 생활 내내 출세 가도를 달려온 이종구는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마치고 [[예편]]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국방부 장관까지 맡게 되며 군인 [[경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국방부 장관 시절에는 1기수 하나회 후임인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진삼]]과 극렬하게 대립했다.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하나회 내부의 전두환계와 노태우계의 권력암투와도 연관이 깊은데 이종구는 비록 노태우에 나름대로 굽히기는 했지만[* 전두환계 군맥 중 노태우에게 굽히지 않았던 박희도는 역시 이종구처럼 노태우의 [[경북고등학교|경북고]] 후배였음에도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끝내지도 못하고 중도 경질되었고 이후로는 정치권에도 들어오지 못하며 완전히 잊혀진 신세가 되고 만다. 특전사령관 직에서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된 이후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온 노태우를 대놓고 엿먹인 [[민병돈]]은 이 사건의 여파로 초기에 숙청당했다. 하지만 이종구는 전두환 라인이었음에도 경북고등학교 [[인맥]]으로 노태우와도 얽혔고 노태우에게 어느 정도 굽힌 덕분에 숙청을 면했다.] 어쨌든 전두환계와 영남계 하나회 군맥의 보스였다. 이에 반해 이진삼은 노태우의 직속 [[부하]] 출신으로 노태우계(이른바 9.9 인맥[* 노태우의 9공수여단장, 9사단장 시절 직계 부하들이다.])와 [[충청]]계 하나회 군맥의 보스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전두환계에 밀려 설움을 겪었던 이진삼 등 노태우계는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며 전두환계를 따돌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하나회 15기의 선두주자는 전두환계 [[고명승]]이었는데 이진삼은 1차 진급한 고명승보다 대장을 1년 반이나 늦게 단 4차 진급자였지만 노태우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고명승이 예편하고 반년이 지나서 육군참모총장을 차지했다.] 양 파벌의 보스로써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종구와 이진삼은 육군에 대한 국방부 장관의 권한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방부 장관보다는 육군참모총장의 권한이 훨씬 컸고 군의 최고 실세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하지만 이종구는 국방부 장관이 된 후 국방 개혁의 흐름을 틈타 장관의 권한을 확대하고 육군참모총장 위에 서려 했다. 이진삼과 이종구는 여러모로 [[악연]]이었는데 육군참모총장 시절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육군참모차장]]으로 이진삼을 휘하에 둔 이종구로서는 이진삼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도 있었다. 1988년 [[오홍근 테러사건]] 당시 책임자였던 이진삼의 동생인 [[이진백]] 정보사령관(갑종)의 군복을 국민 [[여론]]을 구실로 벗긴 장본인이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구였다.] [[기자]]들 앞에서도 숨기지 않고 [[막말]]까지 할만큼 극심했던 대립[* 둘이 싸운게 나름 유명해서 훗날 이진삼이 기자들한테 '내가 이종구'''씨'''랑 사이 안 좋은거 다들 알잖아요?' 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잘 나가던 두 전직 육군참모총장인 [[남재준]] 국정원장 - [[김장수]] 안보실장 수준으로 사이가 나빴다.]은 이진삼이 임기 만료 6개월을 남기고 경질되며 이종구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으나 보름 뒤에 이종구도 국방부 장관에서 경질되며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대로 이종구를 둘 경우 지나친 파워로 제어하기 힘들 것에 대한 노태우의 견제 의도로 추측되고는 한다. 이진삼은 육군참모총장 경질 이후에도 입각하여 [[문화체육관광부장관|체육청소년부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이종구는 이후 [[야인]]으로 남게 되며 화려했던 공직 경력을 마친다. 이종구의 국방부 장관 재임기는 [[북핵]] 문제가 처음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하던 시기였는데 1991년 한 간담회에서 "북핵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군사적인 특수 조치가 요구될 것이다. 그 방식은 [[엔테베 작전]]을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발언해서 국내외적으로 한때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북핵 위협에 대한 군사적 선제 타격'을 처음 공개석상에서 거론한 사례였던 셈이다. 하지만 논란이 계속되자[* 정치권의 반발이 계속되어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반려되었다.] 1991년 10월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전쟁]]을 막으려고 또 다른 전쟁을 감수할 수는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후 국방부 장관직을 떠나고 나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엔테베 발언'이 "북핵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국내외에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의도된 발언이었음을 인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