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구(군인) (문단 편집) === 전두환 시절 ===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하나회는 대한민국의 [[정권]]을 탈취했다. 당시 그는 [[동해안경비사령부]] 참모장[* 이후 제7군단을 거쳐 제7기동군단이 되었다. 이 시절만 해도 수도경비사령부, 국군보안사령부, 육군특수전사령부, 지역 관구사령부와 더불어 지휘관에 소장이 보임되던 사단과 군단 사이의 기능사령부였다. 제5공화국 시절에 이 부대들은 전부 중장이 사령관에 보임되는 군단급으로 승격된다.]으로 동해안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영남 출신에 집권자 전두환의 직계이며 집권 세력 하나회의 핵심이었던 이종구는 이제 [[한국군]]에서 가장 화려한 진급 코스를 달리게 된다. 이후 이종구는 즉각 중앙으로 컴백하여 작전 요직인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작전처장을 맡았다. 1980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당시 [[사단장]] 중 최고 요직인 20사단장을 차지했다.[* 20사단은 당시 [[서울특별시|서울]]에 근접 배치되어 있었고 즉각적으로 서울에 출동이 가능한 근위 부대(이른바 '충정' 부대)로써 군사 정권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단이었다. 하나회 정권에서 20사단은 당연히 하나회 실세들이 독점했다. 이종구 사단장 시절에는 차량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고 그가 물러난 이후에는 수도사단과 같이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이 이뤄진다.] 20사단장을 마친 뒤에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과 더불어 군 내 3대 실세 보직인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임기 중에 수도경비사령부(지휘관: 소장급)가 수도방위사령부(지휘관: 중장급)로 확대 개편되어 [[중장]]으로 진급했고 임기를 마친 뒤에는 역시 최고 실세 보직인 보안사령관마저 역임한다.[* 이 코스를 먼저 [[노태우]]가 밟았는데 9사단장 - 수경사령관 - 보안사령관 순이다.] 각 [[계급]] 최고 보직들을 연이어 역임한 이종구는 1년 후 대장 진급과 함께 [[제2작전사령관|2군 사령관]]으로 이동한다.[* 제2작전사령관은 군사령관 중 제일 한직이라서 의외로 보이지만 그의 진급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맡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장으로 진급해야 되는데 빈 자리가 2군 사령관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3군 사령관 [[최세창]](하나회 13기)의 임기가 1년 반, 1군 사령관 [[안필준]](하나회 12기)의 임기가 1년이나 남아 있어서 1년을 더 기다리느니 2군사령관으로 가게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미 중장 진급 때부터 14기 선두주자로써 13기 선두주자를 1년차로 추격하기 시작했던 이종구는 대장 진급 때는 13기 선두주자를 불과 6개월차로 추격하고 있었다. 공석이 발생해야 진급할 수 있는 대장 계급이라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년 이상 간격을 두는 것이 기본인데, 반란 [[공신]]이자 전두환의 총애를 받아 13기 선두주자로 가파르게 달리던 [[최세창]]만이 이종구 바로 앞에 있었다. 11기 선두주자 [[정호용]]과 12기 선두주자 [[박희도]]의 간격이 2년, 박희도와 최세창의 간격이 또 2년인데 이종구는 불과 최세창과 6개월차였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동기생들 중 그 누구도 이종구를 따라오지 못했는데 이미 소장, 중장 때부터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14기 2번째 대장 [[민경배]]가 이종구 진급 '''2년 후'''에야 대장으로 진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