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정호(1982)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295/2008/07/21/%25C0%25CC%25C1%25A4%25C8%25A35.jpg|width=100%]]}}} || || 입단 동기 [[박한이]]와 함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295/2008/07/21/%25C0%25CC%25C1%25A4%25C8%25A36.jpg|width=100%]]}}} || 2000년 6월 계약금 5억 3천만원[* 실제 계약금은 5억원이었지만, SK에 입단한 [[정상호]]가 4억 5천만원을 받자 삼성측에서 좀 더 부풀려 발표했다. 여담으로 삼성에서는 계약금에 해당되는 세금을 대납해 주고, 이정호의 아버지에게 [[르노삼성 SM5|SM520]](이정호가 삼성과 계약을 마친 2000년 6월까지만 해도 [[삼성자동차]]는 르노에 매각되기 전 삼성그룹 산하였다) 승용차를 새로 뽑아 주었다고 한다.]에 연봉 2천만원, 총 5억 5천만원에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하였다. 당시에는 역대 신인 중 최고액 계약금이었으며,[* 이후 1년 뒤인 2002년 KIA의 [[김진우(1983)|김진우]]가 계약금 7억원, 2006년 KIA의 [[한기주]]가 10억을 받으며 기록이 갱신되었다.] 지금까지도 삼성 신인 중에는 최고액이다.[* 참고로 삼성 신인 계약금 역대 2위는 3억 5천만원의 [[최채흥]]과 [[원태인]], [[이승현(2002)|이승현]] 3위는 같은 년도에 입단한 [[박한이]]가 받은 3억원이다. 여담으로 삼성은 이정호의 실패 이후 2008년 [[우동균]]과 [[최원제]]가 입단하기 전까지 신인 계약금으로 2억원 이상을 준 적이 없다. 사실 2000년대 중반 당시 대구-경북지역 팜이 역대급 흉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특출난 선수가 등장하지 않아 거액을 주려고 해도 줄 선수가 없었다.] 1987년 [[류중일]]의 입단 이후 최초로 공개적인 계약식도 했다.[* 이정호 본인이 계약식을 하자고 제시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정호에 대한 기대감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2001 시즌 전, [[하와이]] [[스프링캠프|전지훈련]] 때 '''157km/h'''의 속구를 던진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헌데 사실은 [[계형철]] 당시 투수코치가 일부러 기를 살려준다고 공을 던질 때마다 원래 구속보다 빠른 구속을 외쳤고,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그걸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다. 2001년 4월 6일, 선발 [[김진웅]]이 5이닝을 소화한 뒤 등판하여 4이닝 투구로 프로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 때 150km/h 초중반을 던지며 삼성의 차세대 에이스가 나왔다고 관중, 기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타구가 팔을 강타하는 부상을 당해 결국 4월 말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도 팔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검진을 받아, 어깨에 이상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고 담당 트레이너를 통해 훈련 프로그램을 짜주고 재활에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얼마 안 되어 트레이닝 팀 개편이 이뤄지면서 이정호의 재활을 담당한 트레이너를 포함해 다른 트레이너들마저 팀을 떠났다. 결국 도중에 새로 개편된 트레이닝 팀에 의해 계획이 변경되면서 재활스케줄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고, 거기에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2군 경기에 등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2군 코칭스태프의 일방적인 지시로 투구 폼도 이리저리 바뀌었고, 결국 구위는 구위대로 저하되고 투구 밸런스와 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성적은 더 나빠졌다. 급기야 [[새가슴]]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결국 프로 데뷔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는 입단 3년차인 2003년 8월 19일 SK와의 경기에서 거두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해에는 [[박정태]]의 현역 마지막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2004년 새로 부임한 [[선동열]] 투수코치의 지시로 [[미국]] [[스프링캠프|전지훈련]]에서 3,000투구 훈련을 하다가, 다시 어깨 부상으로 결국 그 해 7월 어깨 수술을 받았다. 체계적인 재활과 웨이트 트레이닝 없이 무작정 공만 던지게 했다가 이런 사단이 난 듯하다. [[선동열]]의 3,000투구 훈련의 첫 희생자인 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까지 연루되어 결국 2004 시즌 후 군입대 확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