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재용 (문단 편집) === 성장기 === 1968년 6월 23일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손자이자, [[홍진기]] 전 장관의 외손자, [[이건희]] 전 회장, [[홍라희]]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초등학교]],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87학번)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MBA를 취득했고[* 사실 당시엔 삼성뿐 아니라 대다수 국내 수출 대기업의 목표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어 세계 일류 수준이던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는 것이었기에,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 명문대를 가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학사 논문도 근대일본사를 주제로 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성과 그 정치적 의미',1992.], 미국 [[아이비 리그]]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며 학업 과정을 거쳤다.[* 대학원 재학 당시 갑작스레 이건희 회장이 폐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고 와병하게 되었기에, 대학원 논문을 제출하지 못하고 수료만 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공부를 꽤 잘했는지 하버드 MBA 과정에서 동양인 최초로 최고 점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736617|#]] 물론 비서진들도 동행했다는거 보면... 해당 기사에 따르면 게이오 MBA 입학 시험에 한 번 낙방했다고 하고, 하버드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케네디 스쿨]]에 1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MBA 과정에 재학했는지는 불명. 이미 일본에서 MBA를 수료하고 왔는데 재차 MBA에 입학하였다기보단 DBA(박사과정)의 오기로 보인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박사 수료 이후 삼성 경영 일선에 투입된다.] 대학 진학 당시 일화로, 조부인 [[이병철]] 회장이 "[[경영학]]은 나중에도 금방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미국 대학은 학부 과정에 경영학과가 없는 대학이 많다.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과 비슷하게 대학원 과정에서 배우는 학문으로 취급하여 [[경영전문대학원]] [[MBA]] 과정이 보편적이다. 대신 [[유펜]]이나 [[NYU]], [[조지타운 대학교]] 등 경영학과 학부 과정이 있는 학교는 인기가 어마무시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는 [[인문학]]을 전공하라"고 권유해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이재용과 외사촌지간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처음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 진학학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다만 정용진은 1년만에 그만두고 [[미국]] [[브라운 대학교]]로 유학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사족으로 흔히 인문학이나 역사를 배우라는 말을 그냥 취미 생활한다는듯 듣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론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인간' 자체에 대해 알 수 있다기보단 인류가 현재까지 구축해온 여러 '사회'의 변화상과 그 메커니즘을 알 수 있기에, 그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본인 나름대로의 관점과 통찰력이 좀 더 빨리 확립되고 심화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지긴 한다. 이병철이 이런걸 노리고 손자의 인문학 공부를 추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이후 학부를 다니며 다양한 나라의 역사를 공부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 동양사학과는 [[중국사]] 전공으로 유명했다. [[민두기]] 스쿨로 대표되는 사단이 있었고, 학문적 경쟁력이 얼마나 강했냐면 유학 없이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다 딴 한 학자가 미국 대학 교수로 정식 임용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서울대가 중국사 등의 분야에서 세계(동양)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높다. 이는 중국 국내 역사연구가 [[문화대혁명]]으로 박살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당시 동양사학과에 입학한건 중앙일보, 사회부장, 청와대 홍보수석의 증언의 바탕으로 제작된 한겨레의 기사에 따르면 좀 더 확실하게 서울대 타이틀을 따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삼성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는 사회부장의 지휘 아래 서울대 출입기자(먼 훗날 청와대의 홍보수석이 된다)와 몇명의 기자를 현장에 투입했고, 이들이 대학 당국자를 붙잡고 밀착 취재한 결과 6시 마감 직전 동양사학과가 가장 유리하다는 걸 알아내 급하게 연락이 오고 갔고, 이재용은 접수 창구가 문을 닫기 직전 원서를 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661087.html|#]] 입학 이후 이재용의 대학 생활은 이건희-홍라희 부부의 자녀 교육이 그러했듯,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재벌집 도련님하곤 상당히 거리를 두고 학교에서는 또래 동급생들과 함께 생활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학적부처럼 아버지 직업란을 적는 곳이 있으면 [[회사원]]이라고 기입했다고 한다.[* 여동생들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그래도 알게 모르게 주변인들은 그의 집안 정돈 알고 있었다고. 또 80년대 당시 서울대 인문계열 학과 대다수의 분위기가 그랬지만 동양사학과는 특히 [[운동권]]으로 유명한 학과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공부하려고 오는 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학과 자체가 급진적인 운동권적 성향이 강했다. 대학에 입학했던 87년 [[6월 항쟁]] 당시 같은 과 1년 선배였던 최영인[* [[SBS]] 예능본부장을 지낸 최영인 맞다.]과 연인인 척 손을 잡고 [[시위]]에 참가해서 [[최루탄]] 맛을 경험하기도 했고, 전방입소 거부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 특히 87년은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온 사회에 뿜어져 나오던 시기였다. 훗날 [[신해철]]은 발레나 무용처럼 학생운동과는 인연이 없던 과의 학생들도 죄다 쏟아져 나오던 시기라 회고한 바 있다. 이 해를 배경으로 한 [[1987(영화)|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대학생이라면 크게 낯설진 않은 풍경이기도 하지만, 재벌가 3세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과 [[MT]]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 당시 동기들과 각종 논쟁과 [[토론]]도 즐겼다고 한다. 당시 동기생들에게 이재용은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누구한테도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모범생' 이미지였다고.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412200|[그사람] 이재용, 이 사람이 아버지를 이기는 길]]. 그 외 그 역시 평범한 당시 20대 청년답게 흠모하던 여학생과 몇개월 [[연애]]도 해보고, 승마 선수 경력을 살려 상무에 입대할지 아님 학사 장교로 입대할지 등 병역 문제 고민도 했다고 한다. 1991년 11월 허리 디스크로 면제되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