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재곤(1859) (문단 편집) == 가족과 후손 == 부인은 [[대구 서씨]](1858~1936)와 [[평산 신씨]](1870~1963) 2명이고 2명의 부인들 사이에서 7남 1녀를 보았다. 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1남은 [[이원용]](李源鎔), 2남은 이윤용(李潤鎔), 3남이 이연용(李淵鎔), 4남은 이관용(李灌鎔), 5남이 이순용(李淳鎔), 6남은 이운용(李沄鎔), 7남이 이면용(李沔鎔)이다. 장남 이원용은 1880년에 태어나 [[내각]] 참서관을 역임했는데 아버지보다 4달 앞선 1943년 3월에 [[사망]]했다. 이원용은 딸 5명과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장남이 [[이해국]](李海菊), 차남이 이해백(李海栢)이다. 이해국은 이재곤 사후 자작위를 물려받아 [[친일]] 활동을 했으며 그래서 그런지 말년이 좋지 않았는데 1950년 9.28 [[서울특별시|서울]] 수복 직후에 살해당했고 동생 이해백은 아예 실종되었다. 둘 다 자식은 없었기 때문에 이원용의 대는 이재곤의 6남 이운용의 아들 이해석(李海釋)이 [[양자(가족)|양자]]로 들어와 잇고 있다. 2남 이윤용은 1883년에 태어나 1947년 사망했는데 딱히 행적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3남 이연용은 1890년에 태어나 1970년 사망했고 딸 2명만 있을 뿐 아들이 없어 남계는 단절되었다. 4남 [[이관용(독립운동가)|이관용]]과 5남 [[이순용]]은 [[친일파]]인 아버지와 다르게 [[독립운동가]]였다. 자세한 내용은 각 문서 참조.[* 이는 전[[세계]]에서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주길 마련이고 [[공부]]를 잘하는 자식일수록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