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임보 (문단 편집) === 절정 === 736년 이임보는 중서령을 겸한 재상이 된다. 그가 재상이 된 뒤 황제에게 간언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737년엔 감찰사 주자량이 이임보가 재상의 그릇이 못된다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현종이 이에 분노해 주자량을 때려 죽이는 일이 있었다. 현종은 이임보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 황태자인 이영과 형제인 이요, 그리고 이부인을 서인으로 폐하고 자살을 명한다. 그러나 이임보는 나름 실적도 있어서, 당의 율법인 당률과 소의를 편찬하는 일을 완수한 뒤 해마다 50만 매에 이르는 보고서를 간략화해 매주 2매로 올리게 하게끔 개혁하기도 한다. 738년, 관서 절도사도 겸한다. 이 해에 이임보와 강하게 끈이 닿았던 무혜비가 죽는다. 739년, 이부서경을 겸직하고 인사권도 장악한다. 744년엔 현종이 "10년간 이임보에게 맡겨 아무런 문제없이 군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임보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는 것이 어떨까?"하고 말할 정도로 신뢰를 받는다. 745년엔 이임보는 양귀비의 인척 등을 심복으로 삼는다. 이때 이임보는 아예 자기 집에서 정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746년부터는 이임보가 싫어하는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좌천당하거나 암살된다. 이로써 현종의 주위에는 철저하게 이임보의 심복들만 남게 된다. 현종은 재주가 있는 사람을 새롭게 발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임보는 재능있는 자가 발탁되어 새로운 정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을 우려해 시험을 매우 어렵게 출제한다. 때문에 급제하는 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이임보는 재야에 현인이 없음을 축하한다(...). 또한 이임보는 문신들이 장성내 절도사를 거치며 군공을 세우고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재상으로 승진하는 개원시기의 승진 관행을 억제하기 위해 절도사 직책을 철저하게 무관들에게 준다. 그리고 이들 무관들은 이민족 출신이 많았다. 이임보는 이를 현종하게 간할 때 "문신들은 겁이 많기 때문에 병사를 이끌어야 하는 절도사 직책엔 걸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직책은 이민족들에게 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민족들은 용감하고 싸움에 단련되어있고 또한 파벌에 휩싸이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천한 출신인데 황제의 은혜로 인해 발탁이 된다면 이들은 이것에 감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현종은 동의하였고 그 결과 [[안록산]], [[고선지]]와 같은 번장들이 등용된다. 이는 장성내 절도사직까지 무관들에게 줌으로써 이들이 중국 영토 내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휘두르는 군벌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안사의 난]]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정책이다. 748년에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옭아매 갈아치우려고까지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황실에서 황태자와 같이 자랐고(개원초기 토번의 침공때 선봉장으로 나섰다가 아버지가 전사했고, 이를 불쌍히 여긴 당현종이 황실로 데려와 키웠다. 황태자인 충왕 이형과 불알친구...), 이때에 군부 최고의 거물로 손꼽히던 왕충사를 목표로 일단 지정하였다. 왕충사가 표적이 된 것은 막강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때에 들어 하서-농우 절도사직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이나마도 747년 다른 절도사직을 포기한 결과로, 747년까지 삭방, 하동절도사까지 겸직해 4개 절도사직을 소유하고 서북방 일대의 군권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었던 인물이다. 한때 지휘병력만 27만에 달해 안록산은 상대도 안 되는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에 조정에서도 어사대부직까지 맡고 있었다. 일단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을 없애려면 큰 죄목이 필요했다. 이임보는 왕충사가 석보성 공략에 소극적으로 태업했고, 동시에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참소했다. 여기서 황태자건은 둘째치고 고작 성 하나를 공략하는 데 태업했다고 참소한 이유는 석보성이 매우 중요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석보성은 청해성 황원현에 위치한 성으로, 무후~현종 시기 당과 토번의 우열관계를 나타낸다 할 정도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존재한 성이다. 개원시기 장기간 당의 소유에 있었으나 토번이 747년 이를 공략, 점령한 성인데, 당현종이 석보성 탈환을 주장하자 왕충사가 이에 반대했다.[* 이 시기에 이는 돌궐 제2제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 참고로 석보성은 후에 가서한이 탈환하는데, 수백 명이 지키는 성의 탈환에 수만 명의 사상자가 생겨서 '왕충사가 옳았다' 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를 빌미삼은 이임보는 자신에게 위험인물로 성장한 왕충사와 자신이 세우지 않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황태자를 한꺼번에 엮어 제거하고자 기도한다. 그러나 군부에서의 반발과[* 가서한이 왕충사 후임으로 절도사로 부임되면서 당현종에게 직접 왕충사를 살려달라 빌었다.] 당현종의 소극적인 태도[* 황태자를 내세운 쿠데타건은 '황태자가 궁궐 안에만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황태자 이형도 고력사 등 자신의 연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중하는 태도를 보여 살아남았다.]에 의해 황태자 퇴출 기도는 실패, 왕충사 또한 한양태수로 좌천되는 정도에서 마무리지게 되었다. 또한 호부상서 겸 어사중승인 양신긍이 황제의 호감을 사자 심복이었던 왕홍을 활용해 옥사를 일으켜 제거한다. 749년엔 이를 보다못한 함영태수 조봉장이 이임보의 죄를 상소하였으나 이 상소문이 닿기 전에 이임보는 알아챘고 병사를 보내 조봉장을 죽인다. 또한 그는 중앙군의 반란을 우려하여 중앙군의 병부를 폐지하였고 따라서 중앙군은 군대는 없고 관리만 있는 상태가 된다. 이 시점이 이임보의 권력이 최강이었던 시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