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화 (문단 편집) === 평론가 === 이인화는 당시 문단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창작과 비평]]》의 리얼리즘적 사조를 비판하며 1994년 잡지 《상상》에 참여하였다.[* 리얼리즘과 상극인 자신을 띄우기 위해, 속된 말로 자기가 짱 먹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강하다.] 이때 기존의 편집장과 편집위원들이 전부 물갈이되는 사태가 벌어지며, 그로 인해 잡지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1993년 창간 당시엔 편집장은 소설가 주인석, 편집위원으로는 임재철, 서영채, [[강헌]], 김종엽이 있었고, 잡지의 지향점은 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 전반에 대한 신세대적 접근에 가까웠다. 이런 성격은 이후 《리뷰》, 《이매진》 등으로 이어진다.] 같이 참여한 동인은 [[장정일]] 및 [[김탁환]]. 그리고 이인화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문열 뿐만 아니라 당시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소설가였던 [[이창동]]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이 둘은 사실 이인화의 참여 이전, 잡지 창간 때부터 황지우, 박광수와 함께 자문위원으로 참여해왔었다.] 하지만 장정일과 김탁환은 후에 이인화와 결별했고, 현재는 모두 정치적으로 이인화와 정 반대편에 서 있다.[* 장정일은 문재인 지지자이며, 김탁환은 세월호 사건을 다룬 소설 <거짓말이다>를 펴낸 바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대립하게 되는 [[진중권]]을 본격적으로 정치논객, 정치평론가의 길로 데뷔시킨 장본인이다. [* 유명해진 진중권은 정치논객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훗날 강준만 교수와 같은 이들과 안티조선 운동을 펼쳐 결국 조중동 전체의 영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본래 진중권은 정치학이 아니라 미학 등 인문학 관련 전문가였다. 90년대 중반 진중권에게 문학계간지 《상상》으로부터 원고 의뢰가 들어왔고, 진중권은 의뢰에 맞게 '근대 [[유럽]]의 낭만주의와 악마 숭배'를 주제로 글을 썼다. 글 자체는 유럽 [[미술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난히 읽히는 수준이었으나, 나중에 책을 받아본 진중권은 경악하고 말았는데, 본인의 글이 박정희와 [[파시즘]]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배치되고 만 것. 순간 화가 난 [[진중권]]은[* 한겨레에서 당시 겪었던 기분을 회고하기를 "'''마치 [[강간]]당한 느낌이었다'''"고.[[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48306.html|#]] ] 《상상》 측에 이전 원고를 반박(보강)하는 원고를 다시 쓰겠다고 했고, 《상상》측은 승낙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원고를 보내도 실리지 않았다.''' 진중권은 결국 다른 문학계간지 《문학동네》에 반박 원고를 게재했고, 그의 글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당시 진중권의 반박문을 극구 반대, 거부한 《상상》의 편집위원이 바로 이인화였다. 이 얘기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 잘 나와 있다. 잡지의 편집자로써 당시 류철균의 이러한 행태는 이 인물이 저지른 다른 비행[* 예를 들어 학점조작 지시에 난색을 표한 조교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고 이후 학점조작 사건이 드러나자 자신의 압박에 의해 할 수 없이 조작된 학점을 입력한 조교도 공범이라고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행태 등]들에 비교해도 그 악성과 문제점이 덜하다고 하기 어려운 심각한 만행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사실 원저자의 글을 함부로 변개하여 게제하는 행위, 특히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변개하는 행위는 편집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잘못 중 하나라고 불리며, 이에 대한 반론의 게제까지 거부했다는 것은 류철균이라는 인물이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짓밟고 이용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극도로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품성'''을 가졌다는 증거로 보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이 표절등의 사건에 비해 덜 이슈화된 이유는 하필 피해자가 이후 독설로 명성은 날리게 되는 진중권이었던 점도 한몫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 사건에서 격분한 진중권의 반박문이 발전하여 한국 평론계에 실명비판의 지평을 연 계기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정치평론집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탄생했고, 이인화는 일단 여기서부터 엄청나고 처참하게 씹힌데다(...) 이를 계기로 인지도를 높인 진중권이 2000년대의 소위 '논객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논객 중 하나로써 자리잡으면서 국내 인문학자중에서는 손꼽히는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면 그러는 동안 이인화의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은 '예전에 이름 들어본 적 있었지?' 수준으로 급락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이론적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여 대중들 사이에서 잊혀지다시피 하게 되었기에, 말하자면 "에라, 딱히 따로 욕 안해도 진중권이가 알아서 쳐발랐네" 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버린 것. [* 훗날 진중권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버리는 책이고, 1997년 막 박정희 신화가 일어나고 있었을 때 그걸 제압하려고 썼는데, 결국 실패해 박근혜가 대통령 된 사태가 벌어졌다"며, 그 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집필 계기를 제공했던 류철균에 대해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박정희 소설(<인간의 길>)도 쓰고 난리도 아니더니 그 소동의 최종결과가 가히 예술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결국 감방에 갔으니까."라고 비웃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40728001&code=960100#csidx544e0cc260fede8bb1a8ea8ee700465|#]] ]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조선일보]]의 왜곡 편파보도를 비판하는 안티조선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당시 안티조선 운동은 현재의 진보진영의 논객들이나 인재들이 데뷔하는 통로였다. [[진중권]], [[홍세화]], [[고종석]], [[유시민]], [[강준만]] 등등의 여러 쟁쟁한 논객들이 여기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인화는 조선일보의 호위무사 역을 맡았으며, 심지어는 조선일보를 [[나치 독일]] 시대 탄압을 받은 문학가 [[토마스 만]]으로 치켜세워주기도 했다.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1070870360|#]] [* 이 사건은 2001년 DJ정부가 조선일보에 세무조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DJ정부가 조선일보에 악감정을 가지고 세무조사를 실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세무조사 자체는 정당한 법집행일 뿐더러(즉 조선일보가 [[탈세]]와 무관했다면 정부의 세무조사로 불이익을 받을일은 없었다) 이인화가 군사독재시절 친여적 입장에서 항상 김대중 및 민주화운동을 친북 또는 좌경으로 흑색선전을 일삼던 조선일보를 나치에 탄압받은 양심적 문학가로 비유한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런 몰상식한 비유 때문에 분노한 네티즌들이 이인화의 홈페이지에 몰려와 항의글 폭탄을 안겨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이런 행보 때문인지 조선일보는 이인화를 팍팍 밀어줬다. 하지만 이인화는 대체로 막말을 쓰거나 오버를 일삼는 다른 극우문인들([[이문열]] 등)과는 달리,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로 [[박정희]]를 미화하며 조선일보를 옹호했다. 결국 1990년대 후반쯤 부터 박정희 향수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지도자로서 자질이 현격하게 부족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셈이다. >'''이인화 “난 이래서 좋다”''' >'''선악 뛰어넘은 진정한 지도자''' >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평가 앞에서 그가 민족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경세가라는 긍정적인 여론이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부정과 긍정은 나란히 열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인간의 일생에는 공(功)과 과(過)가 공존하기 마련이라는 식의 결론은 적어도 박정희라는 인물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 그의 선과 악, 위업과 과오는 하나의 인간 운명이 갖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의 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리라.” >이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생을 관류하는 불멸의 외침이었다. 그의 영혼에 암세포처럼 번져갔던 죽음의 힘은 운명이 만든 그의 과오였다. 그는 28살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만주군]] 중위였고, 32살에 숙군 대상자로 재판 받고 사형을 구형 받은 [[남로당]] 군사부의 비밀당원이었으며, 45살엔 자유민주국가의 헌정 질서를 짓밟은 군사쿠데타의 주모자였다. 이 씻을 수 없는 죄과, 이 도덕적인 오점들이 국가에 대한 경건주의와 숭고한 자기 희생의 의지를 낳았던 것이다. >죽음의 힘은 그를 채찍질하여 국익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에겐 오직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 절박한 시대적 과업만이 자기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북한의 전쟁 도발을 막으며 경제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국가 생존의 지상명령이 늙고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을 위해 어떠한 변명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1961년 5월 16일의 그 새벽, 헌병대의 총탄이 날아오는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그때 이미 자기 운명의 찻잔을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다 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전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놓았고, 전세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항제철을 세웠다. >유도탄을 개발하고 자주국방을 주창할 때는 미국이 격분했고 막대한 초기 투자가 필요한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불황이 찾아왔을 때는 모두가 그의 죽음을 원했다. 그는 그런 처절한 고독 속에서도 단 한 푼 개인적인 치부를 하지 않았고 자식과 친인척들에게 악랄했으며 자나깨나 나라만을 생각하고 바보처럼 나라만을 사랑하다가 자기 고집대로 죽어갔다. >사람들은 다만 총체적 파탄에 직면한 오늘의 조국 때문에 그를 이야기한다. 역사는 국민 모두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 창조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에게 의욕과 자신을 불어넣어주는 지도자, 투철한 국가관과 공인으로서의 사명감, 청렴성을 가진 지도자가 부재할 때 민생은 파탄되고 안보는 위협받으며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로 타락한다. >깜짝쇼와 세몰이로 점철된 이 부패타락한 정당정치가 민주주의라고 강변되는 오늘, 우리는 비로소 눈을 비비고 선악을 초극한 인간 운명의 한 전형을 진정 위대했던 한 사람의 국가 지도자로서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ㆍ이화여대 교수 >----- >1997.05.13. [[한겨레]] 11면 [[한겨레]] 신문에 실린 이인화의 박정희 찬양 기고.[* 한겨레 신문에 이런 컬럼이 실린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박정희 신드롬에 대해 진단하는 기획기사를 내면서 박정희 찬양측의 입장으로 이인화의 글을 실어준 것이다. 반대측 입장으로는 [[홍세화]]의 글이 실렸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1300289111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5-13&officeId=00028&pageNo=11&printNo=2877&publishType=00010|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