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임 (문단 편집) === [[권신]]의 말년 === 우왕이 즉위한 후 십수 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1386년에 몸이 병들어 사직하였고, 그의 빈 자리는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대신 자리하였다. 이들 또한 이인임 못지 않은, 혹은 그를 능가할 정도의 수탈을 자행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노비들을 풀어서 백성들의 논밭 뿐 아니라 심지어 관료들의 토지까지 강탈하고 다녔는데, 이때 땅 주인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으로 만든 몽둥이로 두들겨 팼기 때문에 세간에는 이른바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고려사]]》 <[[임견미]] 열전>에서는 우왕이 임견미의 아들인 임치 앞에서 "늬 애비가 수정목 공문을 그리도 즐겨 쓴다며?"라며 조롱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그러던 와중인 1388년 1월, [[염흥방]]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래 이인임 일당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눈감아 주던 [[최영]]이 마침내 폭발하여 [[이성계]]와 결탁, 이인임의 일파들을 일거에 [[숙청]]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진피화]]'''라고 부르는데, 이인임은 이로 말미암아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최영의 역습에 대경실색한 이인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최영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으나 최영은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최영의 서릿발 같은 처벌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일족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던 와중에도 이인임은 증조부 이장경 대까지 대대로 살던 [[성주군|경산부]][* 경산부는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이다.]로 유배가는 선에서 그쳤다. 이미 사직한 후였던 이인임에게 [[성주군|경산부]]로 내려가는 일은 크게 형벌이 될만한 처분은 아니었다. 전근대에 이렇게 강력한 권신은 자기 고향에도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향으로 유배보내는건 그냥 고향에서의 편안한 가택연금 정도를 뜻했다. 이때 '''최영'''이 사사로운 정에 못이겨 '''이인임을 살려준 것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당시 최영이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 라고 건의해 결국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를 받아서 별다른 처벌도 없었다.[* 최영이 이인임의 자식들을 살려준 것은 사실 이인임과 최영의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윤의 제거, 우왕의 유모 장씨 축출, 천도 반대 등의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 같은 입장을 가져왔고, 이인임과는 대립하면서도 같은 시대를 보낸 처지로서 목숨을 건지도록 사정해줄 만큼의 정이 있었다.][* 이인임이 물러나기 약 6개월 전에 판삼사 자리를 놓고 이인임과 최영이 이성계를 두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영이 판삼사 자리에 이성계를 앉히겠다고 말하니까 이인임은 이성계가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라며 경고했다. 훗날 최영은 이인임의 말이 옳았다며 탄식했다.] 그로부터 몇달 후인 '''[[위화도 회군]]'''(1388. 5) 직후. [[조민수(고려)|조민수]]가 갓 즉위한 창왕에게 이인임을 복권시켜 이성계와 맞서도록 건의했으나 그때 이인임은 6월에 이미 병으로 사망한 후였다.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국정이 문란해질 것을 우려했지만, 이미 이인임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이 죽이지 못하니 하늘이 대신해서 죽였다"''' 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되는 인물이 <이인임 열전>의 이인임이다.] [[창왕]]은 이인임의 부고를 듣고 >"평생 영예속에 살았으니 그대는 유감이 없겠지만 난 이제 누굴 의지하면 좋은가?" 라는 유약하고 한심한 내용으로 점철된 애도의 교지를 내렸고, 사람들은 그 교지를 보고 비웃었다.[* 다만 창왕은 이때 당시 9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기에 실권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인임은 살아 생전 [[최영]]을 [[숙청]]하자는 자파의 주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보았을 땐 사실상 [[보수주의|보수파]]이며 여러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던 최영의 무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영과 이인임은 정치면에서는 제법 의견이 맞았으며 정무를 처리하면서는 충돌하는 일이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악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독자적으로 최영을 죽이고자 했었는데 이인임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고, 나중에 최영을 미리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결국 최영이 변심하고서야 이인임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까지 주륙하는 가운데서도 최영은 끝내 이인임을 죽이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셈이다. 말년의 이인임은 유배갔던 [[성주군]]에서 조부 이조년처럼 [[시조(문학)|시조]]를 쓰며 여생을 보냈는데 주로 노년의 소박한 삶을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 본래 옛 선조들의 시조에서 제일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되는 말이 '[[무소유|벼슬 욕심 없다]]'와 '[[안빈낙도]]'라는 역사학자들의 우스개소리가 있다.] 형인 [[이인복]]이 《고금록》, 《금경록》, 《초은집》 등을 남긴 것과 달리 이인임의 시는 대개 소실되었으며 <노년우음>(老年寓吟)이라는 한 편만이 남았다. >[老年寓吟(노년우음) / 노년에 우거하면서 읊은 시] > >宦海浮沈二十年(환해부침이십년) / 벼슬길 부침 20년 >長江嗚咽不平嗚(장강오인불평오) / 긴 강의 불평을 안고 울먹이네. >殘花杜宇聲中落(잔화두우성중낙) / 쇠잔한 꽃은 두견새 울음에 떨어지고 >芳草王孫巨後生(방초왕손거후생) / 왕손이 간 뒤의 방초는 살아있더라. >金馬玉堂非我願(금마옥당비아원) / 금마와 옥당은 나의 원하는 것 아니고 >靑山綠水有誰爭(청산녹수유수쟁) / 청산과 푸른 물은 누가 다투고 있나 >倘罷天荒作國禎(당파천황작국정) / 아마 하늘이 받침대를 파하게 했을 것이니라. 또한 이인임은 말년, 최영에 의해 경산부로 유배된 후까지 공민왕으로부터 선물받은 시를 보존했는데 다음과 같다. >[贈 勝巖公(증 승암공)] >瑞明行白玉(서명행백옥) / 단정하고 밝음이 백옥같으며 >純粹似精金(순수사정금) / 순수함이 마치 잘 다듬어 놓은 금과 같더라 >太和陽春樹(태화양춘수) / 크게 화한 기운은 봄날의 뻗어가는 나무와 같으나 >猗古復見今(의고복견금) /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제 보게 되도다. 내용은 이인임의 단정한 성품을 칭찬하는 것으로, 젊은 날의 충정심은 모두 잊은 채 간악한 권신으로 살아가다 잊혀진 이인임의 말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일생 동안 온갖 영화를 누리던 이인임의 최후는 찾는 이 하나없이 초라했다. 죽기 전 말년인 창왕 시절, 윤소종과 권근이 재탄핵했으나 미지근한 결과밖에 내지 못했고, 공양왕 즉위 이후 오사충 등이 다시금 이인임을 부관참시하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며 가산을 적몰할 것 등을 청했으나 묘는 아직도 터 좋은 자리에 멀쩡히 남아있고 왕은 집을 연못으로 만드는 것 하나만 받아들인다.[* 집을 헐어 연못으로 만드는 것은 대역죄인에게 해오던 관행이었다.] 이 연못은 조선 태조 3년 이인임의 직첩을 되돌려줄 때 메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