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응 (문단 편집) === 고종 즉위 이후 === 유배지에서 고생을 하던 중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양력 1864년 1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 [[세도정치|세도]]의 절정기는 막을 내렸고 곧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풀려났다. 이후 이세보는 1865년(고종 2년)에 벼슬 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성부우윤 · 한성부좌윤[* 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 격.]이 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 병조참판[* 현재의 [[대한민국 국방부]] 차관 격.] · 동지돈녕부사[*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왕의 친족을 관리하던 곳인 돈녕부의 수장.] · 형조참판[* 현재의 [[대한민국 법무부]] 차관 격.] · 공조참판[* 현재의 [[국토교통부]] 차관 격.]을 지냈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이인응(李寅應)으로 개명했다. 그 뒤로도 여주목사[* 현재의 여주시장 격.] · 오위도총부 · 한성부판윤[*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 · 공조판서[* 현재의 [[국토교통부]] 장관 격.] · 형조판서[* 현재의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격.] · 판의금부사[* 의금부를 총괄하는 관직이며, 품계는 종1품이다. 주로 6조의 판서나 좌우참찬, 좌우찬성이 겸직했고 또 우의정이 판의금부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주로 의금부를 총괄하며 위급한 사건을 수사할 때 왕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지냈다. 특히 여주목사 등 지방관을 지낼 때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민심을 얻기도 했다. 그가 떠날 때는 백성들이 제발 가지말라고 애원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