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응 (문단 편집) === 파양과 유배 === [[철종(조선)|철종]] 시절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왕족]]으로 [[경원군(1842)|경원군 이하전]],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다. 경평군은 세도가들과 사이가 안좋았고, 자연히 그들은 경평군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60년(철종 11년)에 일이 터졌다. 경평군의 생가 친동생 이세익(李世翊)[* 1868년 이택응(李宅應)으로 개명.]이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 翰林, [[조선시대]] 예문관 검열의 별칭.]에 임명받았으나,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함으로써 임명이 힘들어졌다. 이에 철종이 전례없이 크게 노여워했는데, 이를 두고 세도가 쪽 [[신하]]들은 경평군이 친동생을 위해 철종에게 몰래 청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제히 [[한성부|도성]] 밖으로 나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다. 그러자 화가 난 경평군은 판중추부사 [[김좌근]],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 [[철인왕후]]의 아버지.] 등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였다.[* 단, 이 말 자체는 [[경원군 이하전]]이 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둘 다 안동 김씨를 고깝게 본 것은 맞다.--]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대사헌 서대순(徐戴淳)을 시켜 경평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으며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철종(조선)|철종]]은 어쩔 수 없이 경평군을 결국 [[한성부|한성]] 밖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대간들은 탄핵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결국 같은 해 11월 4일 풍계군의 양자에서 [[파양]]당했다. [[왕족]] [[신분]]으로 받은 경평군은 즉시 폐작되었으며 이름 역시 종친 자격으로 얻은 이호에서 예전 이름 이세보로 돌아갔다.''' 여담으로 다시 대가 끊어진 [[은전군]] - [[풍계군]]의 후사는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 [[완평군|완평군 이승응]]이 새로 입양와서 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sBdWECtlI)]}}} || || {{{#ffffff '''완도군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이세보의 눈물〉 '''}}} || 이후 [[전라남도]] [[강진군]]의 [[신지도]]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지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많은 [[책]]과 [[시조(문학)|시조]]를 썼다. 대표적으로 일기인 《[[신도일록]]》과 시조집인 《[[풍아]]》 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각 문서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74837833_2.jpg|width=100%]]}}} || || {{{#ffffff ''' 이세보 문학 기념비 '''}}} || [[시조(문학)|시조]]의 소재는 [[부정부패]] 비판과 [[애정]], [[도덕]], [[기행]], 옛 일에 대한 고찰(考察), 그리고 [[여행|여행지]]를 두루 지나며 느낀 감흥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제와 내용의 다양함은 다른 시조와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세보 시조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조들을 많이 썼기에 현재 신지도를 관할하는 [[완도군]]에선 완도읍 장좌리 수석공원에 이세보 문학 기념비를 세워 그의 문학성을 기리고 있다. 참고로 신지도에서 적은 시조는 77수, 평생에 걸쳐 쓴 시조가 총 458수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조를 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 그가 지은 노래 《농부가》가 《2018 [[EBS]] [[수능특강]]》에 실렸다. --아마 저 걸로 이 사람 알게 된 학생들 많을 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KR20180125061100805_02_i.jpg|width=100%]]}}} || || {{{#ffffff '''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 || 이세보가 [[유배]]온 뒤 서울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한 맺힌 눈물을 흘리던 모래사장이 있었다. 이세보가 나중에 서울로 돌아간 뒤 그 곳 모래를 밟을 때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해서, 이름이 명사십리('''鳴'''[* 울 명.]沙十里)[* 울음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린다는 뜻.], ‘울모래(鳴沙場)’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