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영(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여담 == * 이인영을 도와 13도 창의군에 참여했던 동생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142|이은영]](李殷榮)은 1909년 6월까지 경기와 강원 일대에서 항전을 이어갔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에 들어가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 오늘날 그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든 충효의 선후 문제는 당대 [[일본인]]들도 거론했다. 이인영은 뒷날 사로잡힌 다음 [[일본]]측이 한 심문 내용이 남아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h&levelId=jh_098r_0010_0020&types=r]]] >문: 과연 너의 창의의 목적이 네가 말하는 바와 같다면 어째서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맹자의 이른바 대의멸친, 너는 유자인데 동양도덕과 너의 행위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답: 대의멸친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단 돌아가신 뒤에는 재회할 수 없지만 임금은 다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의병은 다른 사람이 지휘할 수 있고 한국의 풍속으로는 부친 사망 후에 상을 치르는 것은 하나의 규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불효에 해당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몹시 불충에 해당합니다. * 이인영 의진은 창의록[* 倡義錄. 의진에 참여한 인사들의 신상명세와 규모, 전적, 전개 과정 등을 담은 진중기록. 의병이 기의하면 편찬하도록 되어 있으며 과장이나 검증되지 않은 풍문이 많아 일본측(특히 공사관) 기록과 필히 대조해야 한다는 한계는 있으나 기본적인 1차 사료로서 의병 연구에 필수적이다.]이 중간에 유실되어 온당히 평가받는게 늦어지기는 했으나 적어도 지금은 신분제의 한계로 인한 실패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문제는 교과서나 한국사능력시험 등에선 전혀 그런 연구결과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 이인영이 을미년에 무엇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정미의병에 다시 투신했으며 13도 창의군이 양주에 모이기까지 어떤 험난한 과정이 있었는지 전후 사정을 대폭 생략해버리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다 부친상을 당했다며 귀환해버리는 바람에 서울진공작전이 망했다는 뉘앙스로 기술하고 아예 낡은 인식을 극복하지 못한 유생 의병장의 한계로 거론하는 바람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을 살릴 마지막 기회를 날려먹은 [[역적]] 취급까지 한다. * 귀향이 원인이 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꾸준히 일제에 저항하다 일제에 잡혀 순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3도 창의군을 마지막까지 이끌었던 허위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과 달리 1단계 낮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허위는 [[박정희]]와 동향인이므로 선정에 있어서 고려가 있었을 수 있다.] * [[세기와 더불어]]에서 언급되는데, 김일성의 주장에 따르면, 나중에 김형직에게 이인영의 얘기에 들은 김일성은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한 이후 친구들과 이인영이 부친상을 치르러 낙향한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나라와 가정을 다같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라야 참다운 효자라고 할수 있다. 가정만을 중시하고 나라의 환난을 경시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효자라고 부를수 있곘는가. 이제는 우리도 효성에 대한 유교적가치관을 바로잡을 때가 되였다. 리린영이 만일 자기 책임을 다하여 목적을 성취하고나서 부친의 묘소를 찾아 술이라도 붓고 분향재배하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손들앞에서 더 빛을 냈을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욕만 하지는 않고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쌀짐을 지고 토기점골의 집으로 찾아갈 때 나는 새삼스럽게 리린영의 이 일화를 생각하였다. 어째서인지 그 창의대장의 행실이 옳은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지난날 쓸개빠진 의병장이라고 입을 모아 비난하던 그 사람의 행위에서 내가 약간의 정의나마 발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그를 동정하고 그에게 약간의 리해를 표시하게 된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졌다가 [[강반석]]에게 혼났다 카더라. [[분류:조선 의병장]][[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이씨]][[분류:여주시 출신 인물]][[분류:1868년 출생]][[분류:190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교수형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