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영(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목 북면 교향동(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다리목마을)에서 아버지 이현상(李顯商)과 어머니 [[한(성씨)|한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여주목 북면 일대에 터를 잡고 넓은 농지를 가졌던 부유한 지방 양반가였다. 그는 오위도총부총관을 거친 고조부와 오위장을 지낸 증조부의 영향인지 주자학 외에 군사 분야에 나름대로 식견이 있었다. 이인영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고 임용을 기다리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바로 귀향해서 3년상을 치르고 다시 과거를 보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이후 정동현(鄭東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에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반일 기조가 높아지고 거사를 물색하던 재야 유림들은 [[고종(대한제국)|고종]]과 그 측근들의 밀지나 창의 권고를 받고 의병 봉기를 촉구한다.[* 구한말 의병장들은 대부분 고종이나 그 측근들 손이 닿아있었는데 [[황제]]의 신물인 밀지가 있어야 정치적, 군사적, 사상적 정당성과 합법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 때 밀지를 받고 일어난 의병장들이 [[유인석]], [[이소응(조선)|이소응]], [[김하락]] 등이고 이 사람들이 다시 각지에 밀지 사본과 창의 격문을 뿌려서 호응을 촉구해 뒤이어 봉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인영도 그 중 1명이다.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시|원주]] 지역 무대로 항일 운동을 하다가 1896년 2월 유인석의 격문을 보고 여주에서 봉기하는데, 이 때 여주에는 이미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의병장 김하락이 임명한 여주대장 심상희가 따로 있어서 부득이하게 강원도 원주로 가서 의병 활동을 한다. 원주에서 활동한 유일한 의병 부대였는데 크게 얻고 잃은 것도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일본]]군이나 관군과 큰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심상희 의진과 갈등을 빚는데 [[아관파천]]으로 고종 세력이 의진에서 이탈하기 시작하고 봉기가 길어져 군량도 부족해지자 심상희는 개화파와 타협하고 후사를 도모하자며 이인영 의병진 중군장이자 자기 친지인 한진국을 설득하다 여의치 않자 그를 죽여버린다. 의병장들의 출신 성분이 달라 생긴 사건이었는데, 심상희는 고종의 이종사촌인 심상훈의 일가로서 동도서기론적 입장을 가진 근황파에 속했다. 친일 개화 [[내각]]을 타도하고 신내각 설립을 위해 의진을 일으킨 근황파들은 척화 성향이 강하고 보수적인 유림들과 부딪히는 점이 너무 많았다. 오직 배일(背日)의 기치 하나로 서로 다른 성향의 집단이 손을 잡은 것이었는데 고종이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자 연대에 금이 간 것이다. 핵심 지휘관을 허무하게 잃은 이인영 의진은 한결 강력한 심상희 군세에 차마 덤벼들지는 못하고 일부만 남아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에 합류한다. 제천의병 내에서 이인영의 행보가 주목할만한데, [[청일전쟁]] 때 참전했다 귀국 못하고 조선에 남아있던 [[청나라]] 병사 7명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배일 의식이 투철하고 정규군이라 훈련도도 충실해 수는 적지만 상당히 귀중한 전력이 되는데 훗날 제천의병이 관군과 제천성에서 결전을 벌일 때 의진 전투력의 중핵으로 활약했다. 이인영은 7명 외에 자기 집 농지를 싸그리 털어서 청나라 용병을 고용하고 무기를 구입했기 때문에 을미의병이 마무리될 무렵 그의 재산은 거의 녹아내려 1908년 중순 시점에는 밭 2두락, 화전 3두락에 현금 1,500냥이 전부였다. 1896년 5월 하순 제천성 전투가 의병의 패배로 끝나자 이인영은 계속 남아서 의병들이 재정비할 때 병력과 물자를 모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고종의 해산 권유가 내려오자 의병진을 떠나 낙향한 후 [[충청남도]] 덕산에 내려가 국가에서 금지한 홍삼 재배를 통해 무기 조달 자금을 마련하다가 적발되어 일본 헌병과 조선인 보조원 20여 명에게 체포될 뻔하다 기습해서 뿌리치고 겨우 도주했는데, 뒷날 전말을 전달받은 고종이 특사를 내려 묵인해준다. 곤궁한 처지로 [[경상북도]] [[문경시|문경]]에 은거하며 아버지 병수발들던 1907년 8월 원주에서 거병해 여주, 지평, 원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서울 출신 선비 이구채와 원주 출신 유생 의병장 이은찬이 병력 500명을 거느리고 이인영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이인영에게 거의하여 원주에 원수부를 세우라는 고종의 밀칙을 내보이며 이인영을 설득한다. 부친 병환 탓에 고민하는 이인영에게 아버지가 직접 "이 때처럼 나라와 백성이 너를 필요로 할 때가 또 있겠느냐"고 권하고 이구채와 이은찬이 "국가 존망의 시기에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우니 공을 먼저 하고 사를 나중에 함이 마땅하다."고 거듭 설득하자 1907년 9월 2일 원주에서 거의한다. 전국 8도에 격문을 보내 봉기를 독려하고 자기가 밀지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호응을 얻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군량 부족으로 의진에 참여한 포군들이 민가에서 식량을 약탈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인영은 [[충청도]]의 [[이강년]] 의진과 주로 협력했는데 이들과의 연계도 마냥 잘 되지는 않았다. 계속 원주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이인영은 관동 지역의 의병부대 통합 작업을 시작해 13도 창의군의 모태가 되는 관동창의군을 결성한다. 관동창의군은 원주에서 지평으로 이동해 1달간 머무르며 일본군과 수 차례 교전을 벌이는 한편 서울 진격을 위한 군사력 보강에 주력한다. 이렇게 해서 수 천 규모의 의병이 모였고 13도 창의대장에 오를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 이인영은 일본과 친일 세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려면 서울진공작전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연합 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1907년 10월 전국 각지 의병장들에게 통합 의병부대를 조직해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전하고 경기도 [[양주시|양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데 이 모든건 고종의 밀지가 준 권위가 있어 가능했다. 흔히 알려진 만국공법에 의거해 언론사와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뿌린건 이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다. 의병진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다 지평 일대에서 다시 일본군과 대규모 교전을 벌이는데, 1907년 11월 7~9일 삼산전투와 마전전투가 그것이다. 우선 삼산전투는 관동창의군 1천명에 합류한 의병들을 합해 2천명이 연발소총과 산포를 앞세운 일본군 2개 중대와 교전해 이틀간 혈전을 벌인 끝에 200~300명의 사상자 내고 퇴각하고 다음 11월 8일 밤에 시작된 마전전투는 연합 의병 1천이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마전의 일본군 수비대, 긴급파송된 금화수비대, 철원수비대와 교전해 이튿날 새벽까지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무기와 훈련의 열세 속에 다른 창의군과 합류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된다. 그리하여 1907년 12월 초순 양주에 도착해 그 과정에서 [[춘천시|춘천]]과 [[양구군|양구]] 사이에서 의병 정예 400명과 일본군 60~70명이 맞붙어 2차례 격전을 벌인다. 여기서 이인영은 13도 창의군 총대장에 오르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인영은 [[허위(독립운동가)|허위]]보다 11세 연하고 관력에서도 비교적 고위직을 역임한 허위에 비해 이인영은 하급 무임직을 잠시 맡아본 적이 있을 뿐이었으며, 직할 병력도 을미년에 가산을 전부 소진한 이인영보다 허위가 훨씬 많았다. 양주 집결시 허위에게 자금 지원을 받았을 정도로 군자금도 열악했고 13도 창의대장에 오른 뒤에도 재정권은 군량관 [[김병화]]가 쥐고 있어 재무 처리에 일체 관여하지 못했으며 중군장이자 관동창의군 내부 살림을 책임졌던 이은찬의 발언권이 이인영 못잖게 컸다. 결국 [[바지사장]]에 가까웠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된 이유는 먼 조상이 보부상 출신인 허위와 달리 뼈대있는 양반 집안 소생이었고 을미년에 가산을 털어 적극적으로 창의에 힘쓰며 공정한 행실로 인심을 얻고 있었고 무엇보다 고종의 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합류하지 못한 이강년, [[신돌석]] 등을 편제에서 제외하는 조직 개편을 거쳤는데 이 때 허위가 군사장으로 공식적인 창의군의 2인자가 되면서 직할 부대가 적은 이인영의 발언권은 더욱 줄어든다. 이후 허위는 선봉대 300명이 우선 진격하나 무장, 조직력, 훈련에서 모두 앞서는 일본군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창의군의 사기는 크게 꺾인다. 당초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은 경상도의 정용기와 신돌석, 전라도의 [[안규홍]], 충청도의 이강년 등 삼남 지역 의진들 다수가 일본군 수비대 혹은 친일 민병대와의 교전으로 합류하지 못한 상태에서 1907년 10월부터 교전을 지속해온 탓에 탄약마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부족한 병력,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탄약, 떨어지는 훈련도와 무장같은 악조건이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창의군의 명령 체계였으며 이인영 밑으로 명령 체계가 단일화되어 있지 못했다. 관력, 연배, 발언권에서 이인영보다 앞서는 허위, 이은찬, [[민긍호]]같은 인사들이 여럿이었고 총대장 신분에 부대 금전 업무에 관여를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자연히 창의군의 명령 체계는 느리고 복잡해졌는데 이는 의병장들 개개인 문제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병대를 끌어모은 조직 자체의 한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 와중에 부친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오자 이인영은 허위에게 대장직을 넘기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귀향한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거의 다 된 일을 상 치른다고 파토내고 무턱대고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귀향하기 이전부터 돌아가는 판세를 보고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내용의 통문을 작전에 참여한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고, 마무리 과정을 허위가 맡게 했다. 을미의병 때 인연을 맺었던 유인석은 해외 도피를 권했으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이인영은 거부하고 남기를 택했다. 1909년 6월 문경에서 체포되는데, 이인영에게서 고종과 한국 [[황실]]에 남아있는 항일 세력을 뽑아낼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조차 그의 처분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이인영은 일체의 권유는 없었으며 망국의 길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거의했다며 고종을 끝까지 보호한다. 일본인들조차 의사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던 이인영은 그 해 7월 29일 소위 내란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고[[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A_A03_07A_29A_00040|#]] 1909년 9월 21일, 생일을 단 이틀 앞두고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이인영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국가를 위하여 창의하여 충군애국의 정신은 물론 나의 성의로 이를 발기시킨 것이다. 세사는 뜻때로 되지 않았고, 또 부친상을 당하여 얼굴도 배견치 못하고 충효 공히 죄인으로 천지에 몸 둘 바가 없게 되었다. 이 이상은 죽을 수밖에 없다.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사후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