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응준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1891년 [[평안남도]] [[안주시|안주군]]에서 이정수(李正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6년]] 상경하였다. 고향선배이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노백린]]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로 하였고 [[육군무관학교]]에 1908년 편입하였다. 또한, 노백린의 소개로 이응준과 동향인 이갑을 만나 그의 집에서 지내면서 육군무관학교 편입 이전 보성전문학교 1학년을 1기로 다녔다. 1908년에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남은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하였고 순종황제의 명령하에 1909년 9월 3일 일본 동경 소재 일본 육군 유년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 [[조선인 일본군]]으로 일본 유학을 허가받아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응준은 32등으로 졸업하였으며 이는 홍사익(26등)을 이은 최고 등수였다. 그의 다른 동기들은 대한제국 김기원 장교의 남동생 김준원, [[유승렬]], 작가 염상섭의 친형 염창섭, 조철호, 신태영, 박승훈 등이 있다.[* 당시 [[일본군]]이 될 수 있는 조선인은 [[왕공족]]이거나 한일강제병합 당시에 협조했던 [[대한제국군]]의 [[장교]]들, 그리고 합병 당시에 [[사관생도]]였던 일부 인원만이 가능했다. 26기 동기로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나 [[김경천]], [[지청천]], [[홍사익]]이 있다.] 임관 직후 제1사단 제3연대에 배속받은 뒤, 치바 보병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으면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8년 8월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일본이 가담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된 일본 파견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통해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파악하고 [[사찰|대민 정탐 활동 업무]]를 담당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청천, 김경천 등과 일본군을 벗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합의하고 망명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응준은 실행하지 않았다. 이응준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최성수에게 권총을 빌려주었다가 최성수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헌병대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고, 그를 아끼던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배려로 풀려났지만 대신에 망명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20년 이응준이 최성수에게 권총을 제공한 사건에 연루되긴 했으나 '''단순 도난 사건으로 처리되어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 일본군에서 권총은 개인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이유는 일본군이 장교에게 권총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 일본 장교들은 사비로 권총을 마련해 들고 다녔고, 권총이 싼 것도 아니다 보니 장교단 내에서 봉급이 낮은 하급 장교들의 경우 소지한 권총의 모델만 봐도 집안 사정을 대강 알 수 있었다고...] 해석의 여지가 있다.[* 친일인명사전 역시 정부 공인기록은 아니므로 회고록이나 민간단체의 기록이나 각자의 생각을 서술하는 점은 같다.] 이처럼 해석상의 여지가 남아있는 이유는 이 시기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 혹은 무기를 제공하더라도, 제공받은 이가 체포될 시 제공자까지 연루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제공자와 수령자가 서로 절도 혹은 강도로 입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이응준은 우쓰노미야 대장에게 칭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그는 일본 육사 동기인 [[신태영]]과 함께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1925년 11월 곽송령([[궈쑹링]])사건이 발생하자 펑톈에서 현지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1928년 [[장제스]]의 북벌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제남 사건]]을 일으켰을 때 펑톈에 파견되었다. 펑톈에서 장쭤린 폭살 사건이 일어나자 현장으로 출동하여 경비를 섰다. 1933년 일본군 육군 소좌로서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으로, 1934년 8월에는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일본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공적을 인정받아 훈4등 [[훈장(상훈)/일본|서보장]]을 받았다.'''[* 서보장은 '국가 및 지방 자치 단체의 공무 또는 공공적인 업무에 다년간 종사하고 공로를 쌓아 성적을 올린 자'에게 수여한다.] 1936년 [[중좌]]로 진급했고 이듬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주로 병참 업무와 징집 업무에 종사했다. [[산둥성]]에서는 직접 [[팔로군]]과 싸웠고 남원 전투, 석가장(스자좡) 전투, 산서성(산시선) 전투에도 참전했다.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 건설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계몽시키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 뒤 임분 전투와 산시성 일대를 장악하는 전투에 종군했다. 1939년 1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대좌]]로 진급했고 [[학병]] 홍보 등을 했다. 홍보의 내용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동'''이었다. 이응준은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인력 동원에 앞장섰다.[* 학병 홍보의 경우 계속 사양하다가 부민관에서 [[김석원]]과 참석했고, 여기서 문제성 있는 발언을 했다.] 동 시기에 민족운동가 등과 교류한 것으로 그의 회고록에 적혀있으나 실제 사실유무는 알 수 없다.[* 회고록에 따르면 유진산, 장택상 등과 교류하며 "일본이 이대로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 얘기했다고 한다. ] 이런 여러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에 포함시키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았다. >애국지사 이갑의 지원으로 학교를 다녔고, 그 인연으로 사위가 되었으며, 그에 대한 존경심과 동질감을 가졌다. 그런 성향으로 인해 1919년 김광서, 지석규 등과 함께 모의했으나 탈출하지 않았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었다. 직업군인이기 때문에 일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같은 육사 출신이면서 대륙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후배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합리화될 수 없다. 여기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 관념이 결여'라는 구절은 일제에 충성한 대부분의 [[조선인 일본군]]에게도 통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