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은하 (문단 편집) == 가수 활동 == [[1973년]]에 '님마중'으로 데뷔하였다. 브라운관에는 1975년 [[동양방송]]에서 그 해 발표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으로 처음 모습을 보였는데, 그 전에는 미성년자의 방송 출연이 엄격해서 억지로 나이를 올려서 출연한 것이다. 첫 데뷔곡이 방송을 타지 못했고, 이은하 본인도 밤무대에서만 부를 수밖에 없어 그닥 유행세를 타지 못한 데 비해,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은 방송을 타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당시에 [[한영애]]를 제외하고 보기 드문 허스키한 여성 보이스로 내지르는 시원한 가창력에 연예계가 집중했다. 방송 풍조상 TBC 전속으로 활동했지만, 이후 [[문화방송]]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1976년 수상하면서 두 방송사를 넘나들며 광폭 행보를 벌였다. 같은 시기 유행했던 대스타 [[혜은이]]와 쌍벽을 이뤘던 최고의 여자 가수였는데, 음악의 성격이나 분위기가 서로 달라서 라이벌로 비교되지는 않았다. '''1977년 처음 MBC 10대 가수에 선정된 이후, 1985년까지 무려 9년 연속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최진사댁 셋째딸'[* 민요를 기반으로 한 대중가요지만, 드럼 특유의 혼신의 박자 쪼개기와 경쾌한 반주로 인해 시대를 초월하는 힙함을 보여주는 곡이다. [[조영남]]이 [[미국]] 곡을 번안하여 수입했으나, 민요적 성격 때문에 후에 민요풍으로 편곡되었다. 이은하 외에 많은 가수들이 커버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과 '밤차'[* 이 곡에서 선보인 찌르기 춤으로 이은하의 유명세가 한층 강해졌다.], '아리송해', '봄비', '당신께만'이 연속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70년대 말에 이은하의 노래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데뷔 무대인 TBC는 당시 한국 방송계에서는 따라잡을 주자가 없을 정도로 쇼 오락 프로그램 부문에서는 최상위 품질을 자랑하던 곳이었고, MBC는 [[일본]]의 [[후지테레비]]와 제휴하고 있었기 때문에 TBC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쇼 오락 부문에서 맹추격을 하고 있었다. 이 두 곳의 방송국을 확 잡고 있었으니,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980년 11월의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동양방송]]과 [[동아방송]]이 [[한국방송공사]]에 강제로 통합되면서 이은하의 가수 인생에 큰 충격이 가해진다. 방송국이 하나의 소속사를 겸하던 당시 풍조상 이은하에게 소속사가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는 현실은 크나큰 충격이자 슬픔이었다. 그 밖에 [[최진희]], 한혜경, [[정윤희]], [[이순재]], [[사미자]], [[송해]] 등 TBC 소속의 유명 톱스타에게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80년 11월 30일 자정을 기해 동양방송은 송출 종료 후 모든 사업이 KBS로 이관되었고, 이날 밤 고별 특집 방송으로 편성된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통해 소속 연예인과 방송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이은하는 이 자리에서 방송 데뷔곡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다가 [[https://youtu.be/y6B3pdOTea8#t=5m2s|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이 메여 노래를 완창하지 못했다]]. 당시에 생방송에서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주간 차트 1위를 차지했거나 [[연말 가요제]]에서 가수왕으로 뽑혔을 때 터져나오는 특별한 감정 상황을 제외한다면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제법 큰 [[방송사고]]였다. 그 결과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령부]]로부터 찍히는 바람에 3개월간 방송 출연을 할 수 없게 되어 다음 날인 12월 1일에 KBS에서 진행한 통합 기념 특집 방송에서는 출연이 제외되었다.[* 그 밖에 함께 노래를 부른 박경애와 혜은이도 등장하지 못했다. 혜은이의 경우는 오히려 MBC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복성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이 날 방송은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컬러 방송이 정식 송출되었던 방송이다.] 출연이 재개된 이후에는 '겨울장미'와 '바람에 구름 가듯'을 통해 당당히 등장했는데, 1982년 조사된 연예인 인기 랭킹에 따르면 이은하는 [[남궁옥분]]에 이어 2위로, [[이미자]], [[혜은이]]보다 순위가 높았다. [[산울림]]의 [[김창완]]이 작곡해 준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이 1984년 방송가 가요대상을 휩쓸고, KBS 가요대상까지 수상하면서 과거의 명성을 다시 되찾기 이른다. 이후 [[장덕]]이 작곡해 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은 긴 곡명으로 유명세를 탄 데다가, 팝발라드 형식에 이은하의 시원한 가창이 가미되어 기록적인 대히트를 기록하며 연예계 커리어의 정점을 기록했다. 1990년대 초반에 건설 관련 회사 사장이던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서서 그로 인해 20억 원에 달하는 빚이 생겼으며, 90년대 당시 시세가 8억 원에 달하던 서울 자택까지 다 넘어가게 되었고, 밤무대까지 뛰며 아버지의 빚 20억을 모두 갚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에 다시 아버지로 인해 생긴 사채 빚이 50억 원에 달하게 되었으며, [[파산]] 선고를 받아 면책 절차를 진행 중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35778.html|#]] 빚을 갚기 위해 가수 활동을 무리하게 하다 보니 허리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스테로이드]][* 당질 코르티코이드 종류로 [[염증]]을 잡아주는 만병통치약이라 불릴 정도로 효능은 좋지만, 부작용이 심한 편이라 절대 남발하면 안 된다.]를 계속 맞았는데, 그러다 보니 부작용으로 [[쿠싱 증후군]]이 생겨 살이 30kg 이상 쪄 상단의 [[사진]]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 되었다. 이 때문인지 이 시기에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를 휩쓸던 대가수의 위상이 무색하게 기량이 많이 떨어졌다.[[http://naver.me/Ig2yYqq0|#]] 다행히 2020년에 들어서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예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가창력 역시 어느 정도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그해 [[4월 25일]] [[불후의 명곡|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가요톱10 골든컵 특집에 출연[* 불후의 명곡에는 주로 아이돌이나 2~30대, 뮤지컬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이번 [[골든컵]] 특집에는 [[정수라]], [[김범룡]] 등 중견 가수들이 출연하였다.]하였는데, 비록 투병으로 인해 외모는 과거와 달라졌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가창력을 보여주며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이 날 그녀가 부른 곡은 [[임희숙]]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이후 2020년 10월 10일에 가요톱10 골든컵 특집 2편에 출연하였다. 2021년 다시 [[유방암]] 1.5기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고 경기도 모 사찰에 머물며 치료 중이라고 한다. 2022년까지는 아직 병세가 남아있어 다시 악화된 듯 싶었으나, 2023년에 접어들면서 많이 좋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2023년부터는 조금씩 다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하반기에는 데뷔 50주년 콘서트를 기획중이라고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