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웅(성한) (문단 편집) === 익주목 계승 === 동년 9월 숙부 이류가 병사하자 이류의 유언과 제장들의 막강한 지지를 받아 3대 익주목으로 즉위했다. 이웅은 성도에 틀어박힌 나상을 유인해 격파할 생각으로 박태(朴泰)를 거짓으로 항복시킨 뒤, 숙부 이양에게 군사를 주어 비성 밖에 매복시켰다. 박태는 서신으로 나상에게 항복하며 비성을 습격하면 자신이 횃불을 들어 내응하겠노라 청했다. 이에 나상이 외백을 보내니, 박태는 긴 사다리를 성벽에 드리우고 횃불을 들어 신호했다. 횃불을 본 외백군이 성벽에 접근해 사다리를 타기 시작할 때, 이양이 일제히 군을 일으켜 외백을 덮쳤다. 외백은 대패하여 성도로 도망쳤다. 이웅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추격하여 성도 소성(少城)까지 차지해버리자,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나상은 성도 태성(太城)으로 물러났다. 외백은 중상을 입은 채 이웅 앞에 끌려왔는데, 어머니의 한쪽 눈을 앗아가고 형 이탕 사망의 원흉임에도 이웅이 그를 용서하였다. 이양을 보내 건위(建爲)를 점령해 나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건위태수 공회(龔恢)를 죽였다. 그 해 12월, 이웅이 직접 군을 이끌고 태성을 공격했다. 군량까지 바닥난 나상은 아문 장라(張羅)에게 태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우비수(牛鞞水)를 건너 동쪽 강양군(江陽郡)으로 달아나 서진 조정에 성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보고하였다. 나상이 도망간 직후 장라는 성문을 열어 이웅에게 항복하였다. 이웅이 성도에 입성할 때, 항복한 진나라 군사들이 심히 굶주려 있는 것을 보고 처현(郪縣)에서 토란을 찾아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 반란군 토벌의 총책임자였던 양주자사 허웅은 조정으로 끌려가 토벌에 진전이 없었음을 문책받았다. 강양으로 도망친 나상은 형주에서 진남장군 유홍(劉弘)이 보낸 보급을 받아 군을 재정비했다. 한편, 이웅은 촉의 백성들이 서산에 은거 중인 범장생을 따른다는 사실을 눈치채, 그에게 임금 자리를 내어주고 스스로 신하가 되려 하였다. 범장생이 권유를 수 차례나 간곡히 거절했음에도 이웅은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고 정사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할 때마다 이리, 이국(李國) 등 여러 제장들과 항상 의논하니, 이리 형제와 제장들은 이웅을 더욱 공손히 받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