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익 (문단 편집) == 생애 == ||<-2> '''이용익의 생애'''[* [[https://web.archive.org/web/20200812071111/https://kuaa.or.kr/bulletin/special.jsp?mode=view&idx=16998|출처]]] || || '''1854''' ||함북 명천 출생 || || '''1882''' ||선공감가감역 - 첫 벼슬길 입성 || || '''1897''' ||탁지부 전환국장 - 광산관리 책임 || || '''1899''' ||전환국장 및 내장원경 겸직 || || '''1902''' ||조정 재정권 장악, 철도 부설 사업 || || '''1904''' ||탁지부 대신, 조선 중립화 선언 추진[br]일본 억류 중 교육구국 의지 다짐 || || '''1905''' ||보성전문학교 개교, 육군 부장[br]망명 - 중국 → 프랑스 → 러시아 || || '''1907''' ||사망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br]고종 황제가 충숙(忠肅) 시호 내림 || 이처럼 양반 집안에서 자라난 이용익은 [[보부상]](북청 물장수) 출신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지리적 이점 덕분에 [[러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보부상 활동 중 왕실의 외척 [[민영익]]과 알게 되었다. 빠른 걷는 속도를 지녀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을 한 [[명성황후]]와 [[고종(대한제국)|고종]]간 정보통 역할을 했다. 또한 [[단천]]에서 숨겨진 금광을 발견해 왕실의 재정에 기여하면서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왕실로부터 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종3품 단천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탁지부]][*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에 존재했던 관청. [[탁지]]에 관한 업무, 즉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재무부)에 해당된다.]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탁지부 대신이 된 후 같은 해인 1902년에 항일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준(열사)|이준]]·[[민영환]]·[[이상재]]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였다. 조정에서 이용익은 친러, 반일 라인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방지에 힘썼다. [[러일전쟁]] 때는 이용익이 주도하여 '대한제국 중립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를 견제하며 [[러시아]]를 적극 끌어들인 친러파에 속했기에, 러시아에 반감을 갖고 있던 [[독립협회]]로부터는 맹공을 받았다. 독립협회에 의해서 고등 재판소에 고발당하기도 했는데, 죄목 중 하나가 화폐를 잘못 주조한 것다. [[화폐정리사업]]과 관련된 일로 잘못된 동전을 풀었던 일이다. 재정을 담당하던 당시 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 일이라는 항변이 있지만, 이와 같은 정책적 실책 때문에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용익에 대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또한 고종의 군비증강정책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육군 양성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해군 양성을 주장한 [[을사오적]] [[이근택]]과 매우 사이가 나빠 서로 암살자까지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만 해도 이용익과 이근택은 같은 친러파였지만 을사조약 이후 [[이용익]]은 계속해서 친러, 반일을 한 덕분에 [[독립운동가]]가, [[이근택]]은 친러에서 친일로 갈아타며 매국노가 되었다. 이후 [[일본 제국|일본 제국]] 수뇌부는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던 이용익 제거가 시급하다고 판단해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시킨다. 당시 이용익의 납치를 위해 일제 [[천황]]이 직접 서명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이용익은 일제에게 '요주의 인물'에 올라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해지자 일제는 국제 여론을 이용해 이용익을 귀국시켰다. 귀국 후 이용익은 [[1905년]]에 민족 최초의 사립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 해방 후인 [[1946년]] 8월 15일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미(美) 군정청령(領) 의거 승인. 때문에 고대에선 일제 시절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해방 이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개편한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도 기념하고 있지만, 그 효시가 되는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로서의 이용익 또한 인정하고 있다. [[http://www.korea.ac.kr/mbshome/mbs/university/subview.do?id=university_010602000000|고려대학교 홈페이지 <고대역사>]]. 실제 설립자 이용익의 흉상이 고대 교정 내에 있다.]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참정대신 [[한규설]]과 함께 공개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져서 투옥되었다. 석방 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한국 독립운동|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이었던 김현토에 의해 피살되었다.[* [[2012년]] [[그것이 알고싶다]] 발표.] 그의 죽음이 당시 대한제국 황실에 알려진 뒤 황실은 그의 시호로 '충숙(忠肅)'을 하사하였다. 이용익의 사후, 그의 정적이자 그를 모함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상당수가 [[경술국치|일본의 조선 강제 합병]]에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재물을 받았다. 반면 이용익의 가문은 일제에 의해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호(독립운동가)|이종호]]는 조부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교주(校主)를 역임하고 [[한국독립운동|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용익에게는 군사정권 시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는데, 학계에서는 그의 공에 비해 훈장의 지위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조익순, 이원창,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 서울:해남 출판사, 2002. 등.][* [[군사정권]] 시기 [[반공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 때문에, 친러파의 입장이었던 이용익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해당 입장의 논지이다.] 때문에 그의 업적을 재평가하여 그의 손자 [[이종호(독립운동가)|이종호]]처럼 [[건국훈장]]이 추서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383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