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익 (문단 편집) == 개요 == [[대한제국]] 시대의 관료, [[독립운동가]], [[교육]]가.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이다.[* 이원계의 맏아들인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5대손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이 이성계 초상화랑 은근 닮은 부분이 있다?--] 아명은 이체동(李體童), 자는 공필(公弼), [[아호]]는 석현(石峴),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내수사|내장원]]경(內藏院卿)과 국가재정의 총책임자인 [[탁지부]]대신(현 [[기획재정부장관]]), 그리고 국방과 군을 책임지는 군부대신(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을 맡았었다. [[대한제국]] 시기 관료로서 몇 안되는 충직하고 유능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 평가된다. 보부상으로 활동하다 [[임오군란]] 중 [[명성황후]]를 구출시킨 공로로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조정에서 대표적인 친러파가 되어 동시에 일본을 견제했고, 이에 당시 친러였던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국정에 여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후 정점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에 빌붙어 출세한 인물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없으며, 이전부터 [[한국독립운동|항일 독립운동]] 활동을 계속하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늑약에 반대하여 투옥되었고, 이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한국 독립운동|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에 [[1907년]] 피살되었기 때문에 민족사적 관점에서 평가절하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그는 축적한 부를 개인적 영달에 쓰지 않고 학교들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힘썼다. [[고종 황제]]가 직접 하사한 '널리 사람다움(인간성, 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보성(普成)'이라는 이름을 교명으로 삼아 [[한민족|민족]] 최초의 근대적 사립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훗날 후신이 되는 [[고려대학교]]의 설립자로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