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영훈(음악가) (문단 편집) == 개요 == >이영훈 선생이 그렇다고 [[발라드]]를 발명한 건 아니다. 그는 없는 것을 창안해낸 게 아니라 있어온 것을, 있어야 할 것을 비로소 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아직 모르잖아요]]', '[[사랑이 지나가면]]', '[[그女의 웃음소리뿐]]', '[[광화문 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과 같은 낯선 패턴의 선율이 어찌 그토록 통렬한 전파대첩을 일궈냈겠는가. 당시 한 여기자는 말했다. '바라던 노래가 이제 비로소 나온 것'이라고...(중략)...1980년대 말에 와서는 급기야 가요와 팝의 위대한 역전이 이뤄졌다. 이영훈 선생의 업적 중의 업적은 서러움과 멸시의 굴레에서 허덕이던 가요가 당당하게 대중음악의 주체로 상승하게 된 밑거름을 제공했다는데 있다. 만약 새로운 패턴의 [[발라드]] 곡 쓰기가 그의 개인적 성공이라면 팝과 가요의 우선 순위 바꿈은 그가 쾌척해낸 사회적 성공일 것이다. >---- >―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0016|작곡가 이영훈 1주기]]〉 >이영훈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하여 통속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는 말로 격하되지 않을 '격이 있는 사랑노래'를 썼다. 과장과 위악과 오만 없이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풍성한 선율과 혼잣말과 같은 가사에 저며 냈다. 그러면서도 자기연민과 감정과잉 속에 허우적대지 않는 담담함이 잃지 않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살다보면 다른 가능성이 두려워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그리고선 '그래 차라리 잘됐어'라고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베어져 저만치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 >― 대중음악 평론가 [[나도원]],〈[[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88065|故 이영훈을 말하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5jiPtinfo8)]}}} ||<-2>{{{#!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aFjOHBDU5w)]}}} || ||<-2> {{{#ffffff '''한국형 발라드의 원형을 만든 故 이영훈 작곡가 STORY'''[*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1화에 나온 방영분.]}}} ||<-2> {{{#ffffff '''작곡가 이영훈- [[지식채널ⓔ|{{{#fff 지식채널e}}}]][[https://jisike.ebs.co.kr/jisike/vodReplayView?siteCd=JE&prodId=352&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1178058|#]]'''}}} || 이영훈은 [[대한민국]]의 [[작곡가]], [[작사가]]다. [[유재하]]와 함께 ''''한국형 팝 발라드의 개척자''''라고 평가받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당시 국내 발라드계에서 전설적인 [[작사가]], [[작곡가]][* 해당 시기에 발표된 대표적인 앨범이 [[이문세]] 3~7집이다. 참고로 이영훈이 작사/작곡한 노래의 [[편곡]]은, [[록밴드]] [[사랑과 평화]]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했고, 이후에도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편곡자로 활동했던 김명곤이 대부분 담당했다.]로 이름을 떨쳤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12/2016021201883.htm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