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이연걸 (문단 편집) === 데뷔전: 엘리트 무술가 === 1963년 베이징의 노동자 가정에서 3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2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197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후 베이징에서 이름난 무술가였던 오빈(吳彬)의 눈에 띄어 베이징 스차이하이체육운동학교(北京市什刹海体育运动学校)에 전학하게 된다. 12세 이후 [[우슈]] 선수로 뛰며 대회에서 우승, 이후 [[https://www.youtube.com/watch?v=EMkz7lTGzQ8|5년 연속 우승]][* 이연걸의 9살 때와 19살 때가 각각 나온다.(36분 50초)]을 이룬다. 워낙 실력이 뛰어나 베이징 우슈 시범단에 소속되어 중국에서 열리던 국제대회 개막식에서 시연을 하기도 하고,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직접 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무협소설에 익숙한 팬들은 그가 무림에서 무술을 단련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이미 무림 같은 곳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모두 없어지고, 제도권의 체육학교 및 무술학교로 흡수되었다. 이연걸이 나온 베이징 스차이하이체육운동학교는 한국으로 치면 체육영재학교 같은 곳이다.[* 대학은 아니고 찾아보면 중-고교 과정까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서 경희대 태권도학과나 용인대 유도학과 등에 엘리트 무술가들이 모이는 것과 똑같다. ] 일단 당시 중국 무술 전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사사로운 무술 전수는 금지되고, 오직 정부 통제하의 무술학교나 체육학교에서만 무술을 익힐 수 있었다. 1982년이 되어서야 이 금지는 풀리고, 이후에 무술전수나 무술학원 설립이 자유화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정부에 의해 무술전수가 금지되고 무림이 없어졌다고 해서 (여기에 [[문화대혁명]]의 영향까지 더해서) 중국무술이 단절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국공내전 이후 각종 유파가 통합되어 무술이 표준화, 제도화되어 체육학교로 흡수되었다. 이렇게 무술 전수의 경로를 정부 통제하에 둔 이유는 이념상의 문제가 아니라 '''치안의 문제''' 때문이다. 이 당시 중국의 무림이나 도장은 거의 조폭급의 행태를 보였다. 20세기 중반 중화인민공화국 집권기의 엽문의 일생을 다룬 [[엽문(영화)|엽문 2]]나 [[일대종사]]를 보면 이들의 조폭이나 다름 없는 행태를 볼 수 있다. 원래 이런 무술 전수 금지는 공산당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 시기부터이다. 소수인 만주족이 한족이 무술을 익혀 반란세력이 될까 두려워하여, 사사로운 무술전수를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아편전쟁]] 이후 청조의 힘이 약화되면서 이런 금지령도 유명무실되었다. 그리하여 대륙에 우후죽순처럼 무림 및 유협집단이 생겨났다. 이어 [[모택동]]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거의 100여년간 중국 전토를 이런 집단이 할거하면서 공식적인 정부 이외에 또다른 정부노릇을 했다. 이렇게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무림 같은 곳은 쉽게 유협집단, 즉 우리말로 하면 [[조폭]]의 소굴, 더 나아가 반란 세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로집권한 공산당 정부가 철저히 규제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제도권으로 편입되지 않은 무술들이 소실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소실된 것은 아니며, 그 제도권에서 키워진 무술가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권 무술가들이 투로나 동작만 강조하여 수련을 쌓다보니, 실전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MMA와 같이 전문적으로 실전만 단련한 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당연히 그럴지 몰라도, 이렇게 동작 및 투로만을 수련한 무술가들조차도 일반인에 비해서는 넘사벽의 격투기 능력을 가진다. 게다가 그런 투로를 연습한다는 무술인들조차도 실전을 겸비하기 위해 격투기인 우슈 [[산타]]를 익히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다만 영화 출연에는 뽀대나는 동작을 보여주는 것은 투로 위주의 전통권이 더 낫기도 하기 때문에 이연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 무술은 문화대혁명보다는 무림이 한족부흥을 내세운 반란세력이 될 것을 우려한 청조 때 대부분 유실되거나 실전되었다.[* 소림사 영화를 보면 대부분 청조 초반의 무술가 탄압이 배경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의화단]] 및 [[의화단 운동]] 참조. ] 다시 이연걸의 얘기로 돌아와서, 이연걸은 우슈 대회에서 투로만 우승한 게 아닌 격투부문도 3연속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실전 능력도 겸비했다. 우슈를 하는 이들 가운데서 [[산타(격투기)|산타]]를 익히는 이들도 의외로 많으며, 동문인 [[견자단]] 역시 산타를 익혔다. 의외로 중국정부 내에서 강건한 기풍을 장려하기 위해 무술인들을 많이 양성했는데, 이연걸과 견자단 외에도 남권 챔피언이었던 구건국 등이 있다.[* 중국무술도 엄연히 격투기이고, 전쟁기술로서 나온 무술이다. 당연히 강한 군대를 추구하는 중국공산당이 중국무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여 군대나 경찰 등에 보급하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연아]]나 [[차범근]]과 같이 실제로 워낙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5인에게 일일이 그들의 비전을 전수받기도 했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게 견자단의 스승이기도 한 오빈 사부 밑에서 이연걸이 동문수학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의 5인의 고수들은 모두 산골의 한적한 곳에서 무도를 닦는 도인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체육영재학교기관들에 재직 중인 교수들이었다. 오빈(1937년생)조차도 산골에서 수련한 것이 아니라 베이징 체육대학에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무술을 익힌 엘리트 권법가였다. 오빈의 제자로는 이연걸, 견자단 뿐만 아니라 [[우징|오경]]도 있다.] 이연걸은 대륙의 엘리트 체육학교에서 우슈 장권을 비롯해 번자권, 진식태극권, 금나술, 솔각 그리고 팔극권사 왕식권으로 부터 팔극권을 배우는 등 우슈와 다양한 전통권을 체계적으로 배웠으며 투로 및 실전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무도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운동회|전국운동회]](중국판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딴 이후 무술계를 은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