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언적 (문단 편집) == 생애 == 본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으나 후에 [[피휘]]로 인해 [[중종(조선)|중종]]이 선비 언(彦)을 이름에 포함하여 [[개명]]하도록 명했다. [[경주시|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이다. 당시에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외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산실인 서백당에 관해서는 [[양동마을]] 건물 내력 참조.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으로 [[서울특별시|한양]]에서 유학하며 문과를 준비했는데 이언적이 10세 때인 1500년 [[요절]]했다. 이후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손소(조선)|손소]]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사람이었다. 18세 때인 1508년 함양 박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때인 1510년 외할머니 풍덕 류씨가 [[별세]]하면서 별급으로 종가(宗家)인 양동마을 무첨당(無忝堂)[* 시경(詩經) 소완(小宛)의 '夙興夜寐(숙흥야매) 無忝爾所生(무첨이소생)'에서 따온 것으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을 짓고 분가하였다. 젊었을 때 인근 사찰인 정혜사에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에는 유불(儒佛)이 상호 보완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학업이 가능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 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 27세에는 [[손숙돈]](孫叔暾)[* 손중돈의 아우.]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일어난 [[무극]]과 [[태극]]에 관한 논쟁[* 자신의 성리학적 견해를 밝히면서 성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이 논쟁은 이후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에 뛰어들었으며 이 근간이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 학파의 학문적 근간이 되었다. 37세에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세자 [[인종(조선)|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할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부상한 직후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자옥산에 별장인 독락당[*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에서 인용하였다.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8장)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을 짓고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종가인 무첨당으로 가지 않고 은둔한 것은 관직에서 사실상 쫓겨난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피해가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주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의 학문관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에 나와 있다. 그는 주자가 다시 살아나온다고 해도 자신의 해석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1537년 김안로의 실각 이후 복귀하여 [[조광조]]의 복권과 [[사림]]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홍문관 응교를 거쳐 1538년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시|전주]]부윤이 되었으며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39년 세자시강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세자 [[교육]]을 담당했다. 1542년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1544년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고 인종 승하 후 [[원상제|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신 [[윤원형]](尹元衡)은 사림파를 축출하려 한다. 이에 이언적은 의금부판사가 되어 사림 [[윤임]](尹任)파를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그 해 12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평안북도]] [[강계군|강계]]로 유배되는데 이후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63세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을 저술하다 1553년 [[사망]]한다. 저서에는 《회재집(晦齋集)》,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자식이 없어서 사촌인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을 양자로 들였다. 이황은 그의 저술을 접하고 크게 영향을 받고 찬탄하여 직접 행장(行狀)을 지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조선에도 주자를 훌륭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언적의 저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조(조선)|선조]] 즉위 이후 1568년 그의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1569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종가인 양동마을 무첨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시호]]가 문원(文元)으로 내려졌고 종묘에 배향되는 [[종묘배향공신]]의 은전이 내려졌으며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핵심적인 공을 세운 인물은 이언적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李宜潛)으로 선조가 [[서인]]들에 의해 부화뇌동하여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의 소위 모호하다는 행적을 핑계로 그의 문묘 종사를 반대할 때 외종매부이기도 한 서애 [[유성룡]]을 움직여 변무(辨誣)하게 했고 백사 [[이항복]]이 <[[명종실록]]> 기록을 살펴 이언적의 무고함을 변백하자 그로부터는 이언적의 묘지명을 얻어내었으며 [[옥산서원]] 원장으로서 이언적의 문집 간행을 주도하는 등 조부의 현양과 가학의 전수에 핵심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