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복 (문단 편집) == 설명 == [include(틀:사건사고)] [[1959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현 용평면) 노동리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사망 시점에서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 1998년 폐교됐다. 현재는 후술할 이승복 기념관의 일부로 사용 중이며 이승복이 다니던 시절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2학년이었다. [[1968년]] 말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북한]] [[간첩]]에 의해 살해되었다. [[1.21 사태]]가 일어난 [[1968년]] 10월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한으로 도주하다가 [[12월 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의 [[초가집]]에 침입했다.[* 당시는 [[북한]]의 무장 공격이 도처에서 벌어진 시대였다. 전년도인 [[1967년]]에는 1, 4, 5, 8, 9월에 [[군함]] 피격, [[군사분계선|휴전선]] 남하 북한군과의 교전, 철도 폭파 테러, [[어선]] 피격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후술할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가족들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무장간첩들이 쳐들어와 어머니 주대하의 이마에 기관단총을 들이대면서 밥을 지어 달라고 협박해 "쌀이 없다"고 하자 이들이 "강냉이(옥수수)나 삶으라우"라고 하여 간첩 2명의 감시 하에 옥수수를 삶아서 줘야 했고 이승복 등 3남매는 간첩 3명에게 둘러싸여 감금됐다. 당시 정부는 주민들을 공비의 만행으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독가촌이라는 집을 지어서 이주시켰는데 이승복의 집은 다음날 이사할 차례였다고 한다. 무장간첩들은 삶은 옥수수를 먹고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채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면서 북한 체제 선전을 하자 그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간첩 중 1명이 이승복을 끌고 온 뒤 나머지 가족들도 같이 끌고 갔다. 이들은 먼저 모친 주씨의 머리를 벽돌만한 돌덩이로 쳐서 죽였고 뒤이어 이승복 본인도 공비들의 양 손가락에 [[찢어진 입|입을 찢기고]] 돌까지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동생 승수와 승자도 같이 살해되어 퇴비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 {{{#!folding 시신의 모습(열람주의) [[파일:이승복(1959) 시신 사진.jpg|width=100%]][br]}}} || 이후 발견된 이승복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십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한 상태였다. 즉, 무장간첩들에게 문자 그대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결국 이승복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36곳에 칼을 맞고 거름더미에서 발견된 형 이학관(1953년생, 당시 15세), 이웃집 이사를 돕다가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 그리고 할머니 강순길([[1980년]] 별세)은 살아났으며 아버지는 즉시 달려가 향토예비군 초소까지 가서 신고했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취재했는데 [[조선일보]]가 이승복 가족 4명이 북한 무장간첩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 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는 특종 보도를 했다. 당시 취재기자는 강인원[* 1981년 정치부 차장을 끝으로 조선일보를 떠나 총무처 대변인, 소청심사위원, 대우통신 감사 등을 역임함.]과 송종헌 2명이었다. [[파일:공산당이싫어요(조선일보19681211).png]] >'''<잔비(공비 잔당), 일가 4명을 참살>''' >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 > >(전략) ... 공비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열살 난 2남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중 1명이 승복 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 (중략) ... 승복 어린이에게는 "입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면서 양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려쳐 죽였다. (조선일보 1968년 12월 11일 3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211002391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8-12-11&officeId=00023&pageNo=3&printNo=14664&publishType=00010|원본 링크]]) 그의 부친과 조모는 당시의 사건으로 [[조현병]]을 얻었는데 부친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4~5년을 술에 의지하면서 집안에 소홀한 탓에 유가족들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어야 했고 조모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형도 사건 이후 불면증에 시달려 10년간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고등학교 입학도 21세에야 했다. 유가족들은 "너무 지쳤다"며 논란에 휩싸이는 것보다 안식을 바란다고 했다. [[2009년]] 무장공비 120명 중 한 명인 김익풍이 이승복 41주기 기념식에서 이학관 부부에게 사죄하기도 했다. [[2014년]] [[8월 24일]] 그동안 정신질환을 앓던 아버지 이석우가 83세로 강릉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장례식은 지역 인사들이 참석하지 않아[* 그나마 기념관장이 발인 전날 조문을 왔고 화환도 강원도교육청 부교육감 명의로 온 것이다.] 형 이학관과 조카 이경빈 등의 유족 및 친척, 유족 주변인 등만 남은 채 콘크리트 바닥에서 돗자리 하나만 깔고 식사할 정도로[* 기념관 내에 회의실이 있지만 유족들이 식사를 하기엔 협소했다.]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premium&contid=2014082800212&Dep0=twitter#Redyho|조촐히 치렀고]] 이는 '논란과 판결' 문단에 후술하겠지만 90년대 이후 기념사업이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링크의 기사는 이승복 사건을 크게 보도했던 반공 성향이 강한 조선일보로, 조작설 등을 거론하면서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유해는 먼저 간 가족들 곁에 안장되었다. 논란이 많은 사건이며 사건 자체에 대한 조작 [[음모론]]도 나왔으나 '''이승복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것은 사실이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당시 독재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던 탓에 조작설이 난무하였으나 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므로 두 사건은 이런 면에서 비슷한 특징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