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슬람공포증 (문단 편집) == 근대 이전의 이슬람공포증 == 이슬라모포비아라는 용어는 심리학의 발전과 민족주의의 대두 이후인 1918년에 생긴 것이지만, 개념 자체는 역사상에서 여러 가지 유례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이슬라모포비아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 "한 손엔 칼, 한 손엔 쿠란"인데, 이는 이슬람의 전파가 전쟁을 통한 정복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속설이다. 즉, 이슬람 제국이 세력을 키울 때마다 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첫 유럽 진출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로, 771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까지 쳐들어가 유럽을 위협했다. 농담이 아닌 것이, 만약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막지 못했다면 지금 유럽은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주장은 투르-푸아티에 전투 문서에서도 서술되어있듯 이 주장은 현대 역사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1096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어 1099년 일시적으로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이슬람으로부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듯 했으나, [[살라흐 앗 딘 유수프|살라딘]]이 이끄는 [[아이유브 왕조]]가 일어나 1187년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트 2세 하에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발칸반도]] 일대를 점령, 이후 오랜 시간 유럽과의 대치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슬람권은 정복 전쟁을 통한 세력 확장 과정에서 점령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학살이나 추방 대신 기존 거주민의 종교를 인정하되 차별을 두고 세금을 더 거두는 정책(이른바 '지즈야')을 취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http://psi424.cankaya.edu.tr/uploads/files/Shaw,%20Ott%20Census%20System%20and%20Pop,%201831-1914%20(1978).pdf|1831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1/3 가량이 그리스 정교회]]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이슬람과 인접한 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유럽, 이베리아 반도 등 이슬람권과 상대적으로 많은 접촉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전쟁의 위협은 있었어도 이슬람 자체에 대한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무슬림 지배하 비무슬림이 병존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슬람과 타 종교의 병존 흔적은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레반트]] 지역 기독교 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이슬람 해적들에게 습격당하던 중부 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크게 자리잡았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만 해도 100만명 이상의 유럽인들이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노예로 끌려갔다. [[http://www.worldlibrary.org/articles/barbary_pirates |#]] 이슬람 해적들의 습격은 8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8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얼마나 많이 노예로 끌려갔을지 파악하기도 힘들다. 이슬람 해적의 주요 습격지는 남부 [[프랑스]]와 남[[이탈리아]]였는데,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니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힘든 데다가, 동로마 제국 멸망 뒤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무어인]]이 지배했으므로 만만한 상대였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집중되었던 것. 프랑스는 중앙집권이 확립되지 않아 왕과 귀족 간의 다툼과 분쟁이 잦았고, 이탈리아는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힘이 없었다. 또한 16세기 후에는 해상 활동을 활발히 했던 [[영국인]]들도 많이 노예로 끌려갔다. 참고로 정말로 이슬람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던 [[스칸디나비아]] 같은 북해 쪽의 유럽인들은 아예 20세기 이전까지 이슬람에 대해 관심 자체가 별로 없었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라는 항상 [[프랑스]]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바르바리 해적이라면 치를 떨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 무렵 장편 서사시인 무훈시(chansons de geste)들이 일반인 사이에 유행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https://books.google.co.kr/books?id=l0KAlsQ2Yj4C&pg=PA32#v=onepage&q&f=false|이슬람을 상대로 무기를 들도록 기독교도들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 다만 저자는 사학 전공자가 아니라 건축가 겸 디자이너이므로 주의.] 해석한다. [[예루살렘]] 재함락 위기가 감돌던 1145년에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까지 유럽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발단이 단순히 비가톨릭을 배제하려는 중세 교회의 배타성과 기독교도들의 종교적 광기가 원인인 것으로 보던 이전 세대와 달리, 현재 학계는 십자군 전쟁이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배경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Jonathan Phillips, The Crusades 1095-1204, pp. 17-23.] 예루살렘 성지의 수복은 십자군 원정에 순례의 성격을 더해주기 위해 추가된 것이었지, 십자군의 본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슬람의 공격으로 심각하게 수세에 몰린 [[동로마 제국]]의 원군 요청에 의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로마 제국]]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 지배되던 일반인들과는 달리 학자들은 이슬람권과 비무슬림권 모두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슬람권에서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인종을 불문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고, 중세 교회법과 [[스콜라 철학]]에서도 관용(tolerantia)에 대한 관심이 커서 이슬람권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아바스 왕조]]에서 꽃을 피운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각지에서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러한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8491&ref=mobile|학술적인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는 이후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의외로 근세 시절 [[개신교]]는 [[가톨릭]]과의 사이에 비하면 이슬람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다. 교리 면에서 약간 비슷한 것도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도들을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마르틴 루터]]도 오스만 제국에 대해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우상 숭배 금지 등에 대해서는 은근히 칭찬하기도 하며 [[교황]]보다는 쟤네들이 낫다는 식으로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