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슬람 (문단 편집) == [[한국]]과 이슬람 == [youtube(P5FyZZMPQn0)] [[파일:Capture+_2018-03-28-07-44-36-1.png]] 라틴어판 [[알 이드리시]] 지도에 표기된 [[신라]]. 과거 이슬람권 [[지도]]의 특성상 남쪽이 위로 간다. 즉 흔히 아는 북쪽이 위로 가는 세계지도와 180도 뒤집혔다고 보면 된다. 신라가 섬으로 표현된 것은 무슬림들은 남쪽 바다로 항해해 경주에 접근했고 한반도 위쪽으로는 갈 일이 없어서인 듯. 수백년 뒤 유럽인들 지도에서도 한반도를 섬으로 오해한 지도가 나온다. 이슬람은 오래 전부터 '회교' 혹은 '회회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알려졌다.[* '회교'라는 명칭은 1990년대까지도 교과서, 지상파 방송에서 '이슬람교'라는 명칭보다 더 널리 쓰였으나, 2000년대부터 '회교'라는 명칭은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정수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미 9세기~10세기 아랍 세계 지도에서 섬으로 잘못 그려져 있지만 [[신라]]가 그려져 있고, 아랍 학자인 이븐 쿠르다드니가 신라에 와서 머물고 신라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중세 이슬람 세계의 저명한 지리학자겸 역사가 알마수디는 그의 저서 황금초원과 보석광에서 "[[신라]]는 [[금]]이 넘쳐나서 개줄이나 원숭이줄도 금으로 만들며, 사람들은 무병장수한다."며 지상 낙원이라는 식으로 나와 있다.[* 근데 이 묘사는 신라와는 실제 교류가 있었다기 보다는 신라의 존재가 해당 지역에 알려져 있고, 정보가 없어 신비화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시대 당시 일본 역사 학계에서는 해당 묘사가 한국이 아닌 일본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 적이 있으며, 현재도 영문 위키 상에서는 해당 묘사가 일본에 대한 묘사라는 주장이 실려있다. 국내 학자들은 이슬람권과 한국 사이의 교류 기록이 더 자세하게 남았지만 19세기 이전 일본에 무슬림들이 정착했다는 기록이 없다며 반박하고 있다.] [[이라크]] 출신 사람들이 특히 많이 신라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흥덕왕릉]]이나 [[원성왕릉]]의 서역인 조각이나 [[처용]]이 서남아시아 출신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국인이 이슬람에 대해 직접 기록한 최초의 사료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있으나 해당 기록물은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발굴된 기록물로 한반도 내에서는 실전되었던 상황이었다. 혜초는 우마이야 왕조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대식국([[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왕조), 소불림국([[시리아]]), 대불림국([[동로마 제국]])에 등등에 대해 기록을 남긴 바 있다. > 다시 파사국(페르시아)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아가면 대식국에 이른다. 대식국 왕은 본국에 살지 않고 소불림국에 가서 살기는 하는데(이는 우마이야 [[칼리파]]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에 머무르는 대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머무르면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을 자주 방문했던 것을 전해듣고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소불림국을 쳐서 얻기 위해서는 소불림의 산 많은 섬에서 가서도 산다. > > 이 땅에는 낙타, 노새, 양, 말, 모직물, 모포가 나며 의상은 가는 모직으로 만든 헐렁한 적삼을 입고, 또 그 위에 한 장의 모직 천을 걸친다. 이것을 겉옷으로 한다. 왕과 백성의 의상은 한 가지로 구별이 없다.[* 초창기 이슬람 제국은 아랍인 평등주의에 기반해서 사치를 삼가는 편이었다.] 여자도 헐렁한 적삼을 입는다. 남자는 머리는 깎으나 수염은 그대로 두며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 >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원래 전통적인 아랍인들의 식사 방법이다.] 숟가락이나 [[케밥|꼬챙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손으로 잡은 것을 먹어야 무한한 복을 얻는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고, 하늘을 섬기나 불법을 알지 못한다. [[고려]] 전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이 뱃길을 통해 3차례 [[개성시|개경]]을 방문하며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를 보면, [[현종(고려)|현종]] 15년(1024년) 대식국(아랍)에서 온 상인 수백여 명이 [[벽란도]]에 머물러 교역을 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원나라]]의 침략을 받고 [[고려]]가 [[원나라]]에 점령된 시기부터는 [[한국]]과 이슬람 국가 사이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다. 당시 [[몽골인]]들은 자기들만으로 전세계의 제국을 지배하기가 힘든데, [[중국인]]을 쓰자니 믿지를 못하겠고 반란만 일으키고 해서 쓰려하기보다는 없애버리려고 했고, 반대로 많이 싸우면서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위구르]]인들을 행정 관료로 적극 활용했다. [youtube(1GT8xhuJJdY)] 고려인으로 무슬림이 되어 원제국에서 [[다루가치]]로 근무했던 [[라마단 빈 알라웃딘]](刺馬丹, 1312~1349.3.22)이라는 인물의 묘지명이 중국 [[광저우]]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그 아버지 이름이 알라웃딘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아버지 역시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040329/8044652/1|#]] 해당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서도 보도되었다. 한국의 [[소주]]가 고려 시대에 원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식 증류 기법이 수입되어 정착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기원전 3천년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증류 기법이 등장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동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1258년]] 몽골군이 압바스 제국을 정복할 때 처음 양조법을 배웠고 가죽 부대에 넣고 다니면서 마셨으며,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주둔한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지에서도 이 '아라끄'([[아락]])를 빚기 시작했다. 원정군들에게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개성에 예궁(禮宮)이라고 해서 고려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을 위한 모스크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100030/2005/03/009100030200503071750132.html|#]] [[조선]]시대 초기까지 이들은 [[한반도]]에 정착해 살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회교인들이 [[세종대왕]]의 생신 잔치나 새해를 맞이하는 궁중 하례 의식에도 초청을 받아 정례적으로 참석하여 [[쿠란]] 낭송이나 기도를 통해 국가의 안녕 및 국왕의 만수영광을 축원했으니 이를 '회회송축'이라 했으며, 이슬람풍 노래와 음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회회조례'라 불렀는데, 이걸 두고 유학자들이 부정적으로 여겨서 세종 이후에 없애버렸다.[* 출처: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4월 4일 기사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4004_004]]] 태종~세종대에 회교인의 행사를 폐지하는 등의 조치 이후로 기록상에서 한반도의 중세 이슬람 공동체는 사라진다. 이렇게 무슬림이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공존해왔고, 왕가와도 정치 관계를 맺었으며 고위직 일부도 믿었을 정도로 이슬람교가 존재감이 있었으나 끝내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된 이후로 명제국이 쇄국정책을 펴며 교류가 끊어진 것이 큰 영향을 차지했으나 이슬람교가 소수의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믿는 비주류 종교였기 때문에 민간에게 널리 전파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라마단]] 금식 규정이 있는 등 교리가 까다로운 면이 있는 데다가 애초에 신라와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고, 조선은 유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왕가에서 무슬림에게 이런저런 권리를 보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하니 민간에 널리 전파되지 못하고 기술자와 상인, 일부 관료층만의 종교로 남아있게 되었고, 결국 교류가 끊어지고 조선은 [[성리학]]의 국가를 표방해 유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억제하는 와중에 불교나 무속, 그리스도교는 [[숭유억불]]이나 [[조선의 천주교 박해]]등을 당하고도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그보다 기반이 약했던 이슬람은 무슬림의 후손들이 조선 사회에 동화되어 이슬람교라는 존재 자체가 잊혀진 것이었다. 또한 세종 치세에 무슬림의 동화가 명령된 배경도 있는데, 이슬람 과학과 지리학이 조선에 흡수되어 자체적으로 [[칠정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나온 이후 더이상 쓸모가 없어진 무슬림들을 굳이 우대해줄 필요가 없어졌다. [[명나라]] 역시 제국 건국 초에는 무슬림 천문학자 등을 우대해주다가 [[예수회]] 선교사들이 도래하면서 과학 기술을 발전한 이후 중국 무슬림 [[후이족]]들이 찬밥 신세가 되었다. [[파일: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미지.png]] * 조선 시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나오는 유럽, 아프리카 지명은 아랍어에서 한자로 음차된 것들이다. 고려 시대에 유입된 이슬람은 이렇게 조선 초기에 사멸되었으나, 무슬림들이 입던 [[부르카|파란자]]란 옷은 이후에 [[장옷]]으로 변형, 계승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파란자는 원래 타지크족,스키타이족, 소그드족, 파슈툰족이 속하는 동이란 복장이며 동이란 문화에 영향을 받은 중앙아시아의 동이란계 무슬림들은 스탈린 정권 이전까지 파란자를 착용했다. 파란자,차도르와 장옷 모두 여성의 정숙(=전통 농경 사회에서의 가문의 명예)과 부를 과시하기 위한 복장이기도 하다. 다만 장옷의 기원에 대한 다른 설명은 담은 사료는 있는 반면, 파란자와 장옷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확증하는 연구 결과는 아직 없기 때문에 가설에만 머무르고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한국-위구르 관계,version=3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