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라엘군 (문단 편집) === [[레바논 내전]] === 1975년 시작된 레바논 내전에는 1978년부터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레바논 내전은 [[마론파]] 기독교인들과 [[시아파]] 이슬람교인들 간의 내전으로 시작되었으나, 1970년대 초부터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겼던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시아파와 연합하여 마론파를 공격하며 상황이 커지기 시작한다. 극우 마론파 [[카타이브당]] 소속의 민병대와 PLO는 레바논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고, 결국 1978년 레바논 정부가 [[시리아]]에 군사개입을 요청하자 이스라엘군 역시 레바논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본래 레바논 정부는 같은 마론파가 많고 상대적으로 기독교 우호적 국가인 시리아에 군사개입을 요구함으로써 PLO를 축출하려는 계획이었고 시리아 역시 [[아랍사회주의]], [[아랍 내셔널리즘]] 국가이지만 아랍 각국에서 테러를 수행하는 PLO에 대해서는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리아군이 개입하자 PLO를 증오하지만 어쨌든 아랍 국가인 시리아도 싫어하던 마론파 극우 세력이 창설한 민병대 레바논 군단(LF)이 시리아군과 PLO를 모두 공격하기 시작하고,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마론파가 밀집한 동베이루트에 고의적으로 시리아군의 폭격을 유도한다. 이스라엘군은 이를 명분으로 하여 레바논 내전에 참전한 것이다. 이후 전쟁은 PLO와 오월동주를 시작한 시리아군 VS 마론파와 손잡은 이스라엘군의 대리전으로 발전하고, 이스라엘군은 10만 명에 달하는 압도적 군사력을 동원하여 [[베카]] 계곡 공중전을 비롯한 다수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결국 1982년 시리아군의 철수를 이끌어낸다. 이 당시 베카 계곡에서 이스라엘 공군은 [[F-15]], [[F-16]]으로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시리아의 [[MiG-21]], [[MiG-23]] 전투기 82대, 혹은 86대를 격추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시리아군의 철수 이후 동맹 전력을 상실한 PLO는 서베이루트의 일부 구역을 점거하고 농성하였으나, 결국 압도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UN 평화유지군]]의 호위를 받으며 [[베이루트]]를 빠져나간다. 시리아군과 PLO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이후 이스라엘은 레바논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1982년 8월 23일 [[카타이브당]]의 당수 바시르 게마엘을 대통령 선거의 단일후보로 내세워 당선시킨다. 그러나 게마엘은 시리아 요원의 폭탄테러로 동년 9월 14일 암살당하고, 카타이브 소속의 민병대는 이에 대한 보복을 명목으로 베이루트 인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대량학살을 저지른다. 이는 PLO 잔존 세력을 소탕하라는 이스라엘의 유도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스라엘군은 이 학살 당시 바로 근처에 주둔하면서도 학살을 방조하였고 되려 야간에는 조명탄을 쏘아올려 카타이브의 학살을 돕기도 했다. 사브라-샤틸라 학살(Sabra-Shatila massacre)이라 불리우는 이 학살 사건은 이스라엘군 역사상 최악의 전쟁범죄로 손꼽히며, 이 당시 군 지휘자였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 국내의 학살 책임 여론으로 장관직에서 사임하였다. 이 사건은 후일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