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라엘/역사 (문단 편집) === 성립 === >[[야곱|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신명기 26장 5-9절(공동번역)[* 이스라엘이 조상의 신원과 이집트 채류 및 탈출, 그리고 팔레스티나 정착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짧은 신앙고백이다.] [[성경]] 등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핵심 역할을 했던 가장 빠른 시기의 인물 중 하나인 [[아브라함]]의 활동 연대는 단순히 정리하면 기원전 2100년 전후가 되지만, 실제로 그때에 다른 인적 집단과 구분되는 '이스라엘'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때 이 지역은 [[가나안]]으로 불렸으며, 이스라엘의 선조가 되는 인적 집단 또한 가나안 지역의 이른바 [[셈족]] 집단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1209년 무렵의 [[https://biblia.co.il/%EB%A9%94%EB%A5%B4%EB%84%B5%ED%83%80-%EB%B9%84%EB%AC%B8/|메르넵타 석비]]에서이다. 한편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도망친 것으로부터 독립의 기원으로 간주하며, 이에 대해서는 크게 기원전 15세기설과 기원전 13세기설이 있다. 이 중 기원전 15세기설은 [[솔로몬]]이 살던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480년 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성서의 기록을 따른 것이지만, 여러 사실 증거와 맞지 않다는 반박에 따라 480년을 고대 [[근동]] 지방에서 1세대를 나타내는 관용적 의미를 지녔던 40년 x 12세대라는 의미로 보고 이를 현실적으로 25~30년 x 12세대로 보아 이집트 탈출을 [[람세스 2세]] 무렵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기원전 13세기설이다. 이렇게 보면 메르넵타 석비와도 대강 시기가 들어맞기 때문에 《[[십계(영화)|십계]]》를 비롯한 대중 매체에도 잘 알려진 설이 되었지만... 문제는 [[람세스 2세]] 무렵의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있는 시리아와 레반트 지역을 속령으로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 땅을 떠나서 이집트 땅으로 도망갔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오며,[* 이는 단순히 관념적으로 가나안은 이집트와 다르다는 정도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성서의 기술에 따르더라도, 모세는 이집트에서 이집트의 신민 다수를 분열시켜 외지로 끌고 감에 따라 이집트군에게 쫓기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가나안으로 가봐야 어차피 이집트의 영역인 만큼 이집트의 법을 피할 수 없는 신세이며, 중왕국~신왕국 시대 그런 '반란 세력'을 통제하고 가나안 지역을 확보, 안정적 통치를 이어나가는 것은 파라오에게 굉장히 중요한 책무였으며 곳곳에 파견된 정찰대에 의해 보고된 내용이 파라오에게 전달되었음이 아마르나 문서 등의 정밀한 기록으로 입증된다. 역사적 상황에 따르면, 가나안에서 유대인들이 이집트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방황'할 수 있는 배경조차 마련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닐 애셔 실버먼(오성환 역), 2002(원서 2001),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까치, 76-80쪽에 상세하며, 개론서 수준에서 이미 22년 전에 다루어진 내용인 것처럼 학계에서는 이미 수십 년이 넘게 숙지된 사실이다.] 그 밖에 이집트 탈출기의 기록이 과장과 문식으로 덮여 있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이다. 때문에 이집트 탈출기를 그 자체로 사실로 신뢰하지는 않는 것이 중론이지만, 좀 더 긍정적인 학자들은 이집트 탈출기의 모티브가 되는 소규모의 사건, 또는 점진적으로 누적된 인구 이동은 있었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특히 이후 시대에 모세를 받들던 레위 지파가 이러한 이주민들의 전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유포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면적인 탈출과 광야에서의 헤맴, 그리고 [[예리코의 전투]]로 대표되는 정복 과정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원전 13세기 이전의 이스라엘 집단이 인근의 가나안인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꾸준히 야훼만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지적을 한다. 이는 출애굽기부터 시작되어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지는데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이스라엘이 주변국에 비해서 차이가 많은 것도 아니란 의미가 된다. 서로 차이가 크다면 그 차이 때문에라도 섞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 당장에 성경에서 야훼 말고 히브리인들이 섬김이 대상이 된 것들로는 금송아지, 바알 등이 대표적인데 이 모두 주변 민족들이 섬기기도 했던 것들이다. 결국 현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주변국의 종교(기독교, 이슬람교)를 믿으라고 하면 펄쩍 뛸 일이고 그만큼 서로 차이가 크지만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국의 종교를 받아들일만큼 차이가 별로 없었다는 의미.] 이 때문에 기원전 13세기 무렵 농민 위주의 가나안인들을 이전까지 기록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목축민들이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가나안 농민들을 몰아내거나 이들과 합류하여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이라고 보거나('유목민 잠입' 가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이라고 모두 농경민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넘지 않고 현재의 요르단 지역에 남은 므낫세 반지파, 혹은 '길르앗 부족' 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대다수 12지파 사람들과는 달리 유목민이었기에 천대받았다고 나온다.] 이전까지의 사회 구조에서는 하층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이들이 지배 문화를 잠식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이 새롭게 생겨났다는 가설('농민 봉기' 가설) 등이 제시되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342|링크 참조]] 이러한 가설들은 이스라엘의 내적인 변화를 정교하게 설명해야 하는 탓에 이래저래 논전이 오갔던 주제이지만, 새로운 가설이 부각되면서 주목한 것이 '하비루(Habiru)'라는 용어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어로 하층민을 가리키는 멸칭이었는데, 이것이 '히브루(Hebrew)'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관계 문제이다. 성서에 따르면 이집트 탈출 이후 히브리인들은 예리코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점을 학살을 통해 파괴하고 점령하여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존재는 기원전 1209년 무렵 이미 확인되는 반면,[* 성경으로 치면 이 때는 [[판관기]] 시간대로 판관인 기드온이 활동하던 시대다.] [[바다 민족]]의 이주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나안 정착은 그보다 연대가 늦어 기원전 12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로 나타난다. 이 점을 종합하면 도리어 이스라엘인들을 팔레스타인인들이 잠시나마 정복하거나 몰아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이 나온다. 어쨌든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스라엘인들은 고유한 명칭으로 불리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고, 기원전 12~10세기 무렵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비롯한 주변 세력과 상쟁하고 [[페니키아]]인을 비롯한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인들이 무엇을 계기로 결집하기 시작했는가가 문제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문제를 짚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에 따르면 이 시기 이스라엘 지방 공동체의 물질 문화는 주변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단 한 가지, 돼지뼈의 출토가 현저하게 적다고 한다. 이는 어떠한 금기적 요소로 인해 돼지를 먹지 않는 문화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금기가 유지된 공통적인 문화가 현재로서는 야훼 신앙이 탄생한 배경 내지 결과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런 신앙조차도 원래 가나안에 있던 신앙이던 [[엘]] 신앙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라는 명칭까지도 엘 신앙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점차 야훼 신앙 집단은 독자적인 신앙 체계를 발달시켜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 고대 근동의 [[다신교]]적 성향을 극복했다는 것은 아니다. 야훼 신앙이 유일신교화되는 것은 빨라도 [[요시야]]의 개혁 이후이지만 이때도 야훼 신앙과 다른 다신교의 신은 혼재되어 나타나며, 유대교가 유일신교로서 확립되는 것은 [[바빌론 유수]]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또한, 문서 가설에 따르면 남부와 북부의 신앙 공동체가 신을 부르는 명칭(Jahweh-Elohim. 이 중 Elohim은 엘 신앙에서 기원한다) 또한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무렵의 상황을 알려주는 문자 자료는 지극히 적다. 초기 히브리어 자료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https://biblia.co.il/%EA%B2%8C%EC%A0%A4-%EB%8B%AC%EB%A0%A5-gezer-calendar/|게젤 달력]] 외 몇 건에 지나지 않으며 이집트 문헌에서 성서와 교차 검증되는 것은 920년대 시샥([[셰숑크 1세]]로 추정)이 이스라엘을 약탈했다는 기록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후에 가공된 부분을 제외하면, 성서의 [[사사기]] 부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여러 지파가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종교적인 권위([[성궤]]가 가장 대표적)를 중심으로 결속을 확인했으며, 외침과 같이 대대적인 결집이 필요할 때에는 [[삼손]]이나 [[사무엘]]과 같은 영웅적 인물에 의해 군사력을 결집하여 대응하는 형태의 구조였을 것이라고 보인다. 특히 사사기의 전투 형태는 아직 정예화되지 않은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을 때 전투에 익숙한 영웅적 인물이 활로를 뚫어 진영을 무너뜨리면서 전투가 개시되는 모습을 잘 반영한다. 성서에서는 사울 왕조의 시대를 거쳐 다윗 왕조가 성립하면서 세습 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 학자들의 연대관에 따라서 다윗 시대 왕조의 성립을 사실로 보기도 하고, 연대를 내려보면서 다윗은 사사기 시대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 영웅적 인물의 한 명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다윗은 단지 유다 지파의 족장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성서에 따르면 다윗의 즉위가 대략 기원전 1000년 전후, 그 다음의 솔로몬의 즉위가 기원전 10세기 전중반 무렵인데, 앞서 말했듯 920년대 이집트의 파라오 셰숑크 1세가 [[열왕기]]에서 [[르호보암]] 5년에 이스라엘을 약탈했다는 '시샥'으로 여겨지므로 적어도 이 무렵부터는 어느 정도 정확성을 갖는 연대기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분명히 체계를 갖춘 역사시대로 접어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