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라엘/역사 (문단 편집) ==== 유대인 난민 문제로 폭발한 토착민과 이주민 갈등 ==== 하지만 토착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인 폭발한 원인은 따로 있다. 난민 문제다. >1929년의 소요사태가 있운 지 4년이 지나자 고국을 찾아오는 유대인의 귀국 행렬이 엄청나게 늘었다. 1933년 초부터 1935년까지 유대인 13 만명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왔다. '''그들 대부분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팔레스타인행을 선택했다. 유대인 적대 행위에 맞서기 위해 독자적인 국가 건설 계획이 한 가지 이유였고, 또 다른 이유는 많은 나라가 법령을 강화하여 유대인 난민의 입국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22-23쪽 >'''1933년부터 시작된 대단위 유대인 난민 입국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불만히 쌓이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이나 도시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그 무렵 '고위 아랍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회원들은 더 이상의 난민 입국과 유대인에게 토지매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총파업을 일으키자고 팔레스타인들을 선동했다. 아랍권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24쪽 나치에 의해 유대인들은 박해와 학살을 당했고, 살기위해 난민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이 유대인 난민들을 거부했다. 그 난민들이 몰려간 게 팔레스타인이었다.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은 대량의 난민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토착민들의 분노와 봉기는 이런 배경에서 발생했다. 당시의 아랍인 봉기에서 아랍 정치인들의 사상에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없었다. >아랍인 봉기에 참여한 반군한테 1930년대는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막기 위해 싸우던 시기였다. 팔레스타인 국수주의,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태동한다. 그 이전까지는 팔레스타인의 많은 정치인은 팔레스타인의 국경을 넘어 북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이집트까지 뻗어나가는 아랍 제국을 꿈꾸고 있었다.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36-37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