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라엘/역사 (문단 편집) === 20세기 ===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시대부터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추구해왔으며, 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주민들 사이에서 아랍계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860년대 이 지역에서 벌어진 내전 기간 동안 프랑스는 이미 굳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파벌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그 동맹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1920년대에 마침내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마론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떼어내서 별개의 국가로 만들었다. 그 나라의 명칭은 그곳의 지형적 특징을 대표하는 레바논 산의 이름을 따서 [[레바논]]으로 지어졌다. 그 이전까지는 레바논은 나라로서의 실체가 없었다. 그 나라의 주된 통합 요인은 주민들이 프랑스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영국]]의 지배 영역도 그와 유사하게 자의적으로 분할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를 지배하던 아랍 무슬림들은 [[하심 가문]]이었으며, 그들은 영국을 지원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영국은 전후에 그들을 아라비아의 지배자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다른 부족들과도 똑같은 약조를 했다는 데 있었다. 쿠웨이트에 기반을 둔 경쟁 가문인 [[사우드 왕조|사우드 가문]]은 1900년에 터키와 전쟁을 개시했고, 아라비아 반도의 동부와 중앙을 장악하고자 했다. 결국 1차 세계대전 직후 발발한 투쟁에서 사우드 가문이 하심 가문을 물리치자 영국은 아라비아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이다. 하심 가문은 일종의 위로품으로 [[이라크 왕국]]을 받아서 1958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당할 때까지 그곳을 지배했다. 아라비아에 남은 하심 가문의 일원은 [[요르단 강]] 동안의 북쪽 지역으로 이주했다. 요르단의 [[암만]]에 자리한 이 새로운 보호령은 '요르단 강의 맞은 편'이라는 의미인 [[트란스요르단]]으로 알려졌다. 1948년 영국이 철수한 뒤 트란스요르단은 현재의 [[요르단]]이 되었다. 요르단 강 서안과 헤르몬 산 남쪽에는 그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이었던 또 다른 영역이 존재했다. 그 지역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역은 '샴' 또는 '[[필리스티아]]'라고 불렸다. 영국 또한 이를 이어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 불렀다. 팔레스타인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으며, 자연히 이곳의 거주자들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불렸다. 레바논과 요르단, 팔레스타인은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적인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이크스-피코 협정, 그리고 몇몇 영국인들이 아라비아에서 이중 거래를 했던 시점까지만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땅의 거주자들이 자기 삶의 터전과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록 그들의 고국은 아닐지라도 그 땅이 고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에도 복잡한 현실이 존재했다. 오스만 제국 치하,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토지의 소유 방식이 절반 정도는 봉건적이어서 부재 지주가 땅을 실제로 경작하는 '펠라(Felaheen)' 즉, 농부들로부터 소작료를 거두고 있었다. 1880년대 이래로 유럽 유대인들은 중동으로 이주하여,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지만 수 세기 동안 이곳에(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아랍 지역에) 존재했던 기존의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했다. 유대인들의 이주는 시온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유럽적 개념에 자극 받아 성서시대에 유대인이 마지막으로 지배했던 지역에서 유대인의 고국을 창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