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평가 (문단 편집) == 현대 한국에서 ==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일제강점기|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 >----- > [[신채호]], 《이순신전》마지막 부분 中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장면에서의 해설. 그리고 이 해설은 '''결코 과장도 허풍도 아니었다.'''] >---- >"실로 하늘이 내린 인물.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리라. 원칙적이고 기본을 중시하는 태도, 피아의 역량과 지형지물을 정확히 판단한 데 따른 창의적인 전략전술, 필사즉생의 정신, 선비보다도 더 선비다운 풍모와 자기 절제, 나라와 백성, 대의를 철저히 앞세우는 모습에서 '성웅'이란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인물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후기> 中[* [[박시백]] 화백은 《조선왕조실록》완간 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조선의 인물로 세종과 이순신을 뽑은 적 있다. ][* [[선조실록]] 편이었던 10권의 표지 인물 선정 과정에서 [[율곡 이이]]도 손색이 없었으나 이순신이라는 너무 거대한 산이 있었다는 후일담을 밝혔다. 실제로 이순신이 10권의 표지 모델이다.] * 한국인에게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십중팔구 "이순신"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사를 대표하는 성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위인으로서의 이순신의 위상은 독보적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사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 사실상 이순신 말고 거론되는 이가 없는 정도이며,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조선)|세종대왕]]과 함께 늘 1위를 다투고 있다. [[서울특별시|서울]]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두 동상이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인데, 광화문광장의 사회·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대신해 그 자리에 설 수 있을 만한 위인은 없다. 물론 이 두 인물이 또한 서울 출신이고 생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세종: [[종로구]] 통인동, 이순신: [[중구(서울)|중구]] 인현동]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이 장소에 이 두 인물처럼 상징성을 지닌 인물들도 또 없을 것이다. *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 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을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 전반 혹은 선조 시기 정치사(政治史)와 연관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십 센터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 받은 경우라고 해야 맞는 것'''인데, 더 연구해봐야 지금 상황에서 딱히 성과적으로 나올 거리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다. 유명 수군 도독이 어떠한 의미인지, 20세기 내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 [[복무신조|해군의 다짐]] * [[해전]]에서 활약한 인물이므로 당연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장보고]]와 함께 엄청나게 좋아하고 밀고 있는 위인이다. 훈련병들은 기본적으로 정훈교육을 통해 이순신에 대해서 배우며, 훈련병용 교재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고 해군 훈련소의 건물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어록들이 적혀있다.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당시 장계로 올린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가 [[제7기동전단]] 본부에 당당히 걸려 있다. 해군의 다짐 또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로 시작하며, 군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해군의 자존심의 근원이다. 또한 해군사관학교에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이순신 제독 동상도 있다.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 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거나 명색이 충무공 리더십 센터 교관 출신 장교가 전역 후에 [[대륙설#s-2.3|조선은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환빠]]가 되고, 충무공 리더십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 시간에 날조된 <[[칭기즈 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고,[* 심지어 이 이른바 <충무공 어록>이라는 걸 일선 부대에까지 정훈교육자료로 뿌려놨다.] 해군정보단 앞 비석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왜곡된 문구를 '''정보전의 중요함을 강조한 충무공 어록'''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새겨놓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 적도 있는데 [[명량 해전#명량 철쇄설|명량 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 무장으로 승자총통을 쓰는, 그야말로 발로 만든 한심한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 있다지만,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 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 인물 이순신이나 조선 수군사를 연구하는 데는 쥐뿔도 관심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더 나아가 소설 불멸에서 이순신을 사실과 관련 없이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 [[김탁환]]이 해사에서 교수 사관을 했다는 이유로 SBS에서 [[남희석]]과 해사를 방문할 때 해사 생도들이 동원된 장면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Zxl47o.jpg|width=100%]]}}} || || {{{#000000 '''DDH-975 충무공이순신함''' }}} || * 대한민국 KD-2 구축함 1번함인 DDH-975 충무공이순신함은 당연히 충무공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후 동일함급은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이 된다. 하지만 밀덕들은 충무공이라는 상징성 강한 명칭을 고작 구축함에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위인을 고작 KD-2 구축함의 함명으로 사용했다고 불만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당시의 나라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이 건조되기 전까지 해군은 충무공의 이름을 아끼고 아끼고 고이 간직해뒀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지스함에 그 영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IMF로 인해 KD-2 사업이 위기에 처하고 이지스함 개발 계획까지 휘청거리게 된다. 이처럼 앞으로의 꿈이 모두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르는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결국 어쩔 수 없이 KD-2의 1번함 네임쉽(name ship)에 충무공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항공모함]]까지는 무리더라도, 이후의 [[이지스 시스템|이지스]]함에다 쓸 수도 있었는데 좀 참지…' 정도의 뉘앙스. KD-3 이지스함은 결국 [[세종대왕급]]으로 명명되었고, 이 중 3번함에 이순신의 조력자였던 [[류성룡]]의 이름을 딴 '서애 류성룡'이 붙여졌다.[* 실제로 류성룡으로 명명된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을 추천하고 여러 차례 도움을 주는 등 평소 충무공과 인연이 깊었기 때문.] 아무래도 해군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한국형 이지스함에 '''대왕''' 칭호가 붙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국민적 존경을 받는 세종대왕을 붙이는 것도 합리적인 건 마찬가지이고 또 이순신 장군의 성격이라면 구축함이라도 불만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오히려 충심 깊은 이순신 장군의 성정에 비춰 보면 자신의 이름이 선왕보다 높은 함급에 붙으면 불충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2016년 들어 최근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 해군의 핵잠수함 건조 추진이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심지어 2017년 12월에는 F-35B 도입을 통한 항공모함 건조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기대해보자.[*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후속인 경항공모함 [[CVX]]는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의 [[와스프급 상륙모함]]과 [[아메리카급 강습상륙함]]을 모델로 F-35B와 같은 수직이착륙 고정익기 운용까지 염두에 두고 건조될 예정이다. 이 CVX의 초도함이 진수될 때쯤이면, 현 충무공이순신함은 거의 퇴역시기에 다다르게 된다.] * [[해군]]이나 해군 출신자 등 일부에서 해군의 장성 계급을 이르는 호칭인 [[제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공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으로서 세웠고 실제로 해외에서는 전부 '''Admiral''' Yi Sun Shin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 General은 육군 지휘관을 의미하고, Admiral은 해군 지휘관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해군)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Admiral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한국어의 '장군'에 해당하는 단어라는 이유로 General을 사용해 버리면 이순신을 잘 모르는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 봤을 때 이순신을 육군 지휘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만 [[제독]] 문서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육군의 General과 해군의 Admiral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동·서양의 역사적·제도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전근대 동아시아권에서는 대체적으로 육상과 해상의 군 조직이 명확히 분리되지 않거나 일원화된 양상을 보였던 반면 유럽권 국가들에서는 육군과 해군이 개별적으로 성립하고 발달하였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유럽권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계급 체계도 서로 달랐고, 육군과 해군의 계급 명칭을 엄격히 구분하는 관행 역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후 19세기~20세기 들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를 통해 서양의 근대적 군사 제도와 체계를 도입하며 이러한 관행이 동아시아권에도 정착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권의 인물인 이순신에게 근대 이후가 되어서야 도입된 서양의 잣대를 무작정 들이미는 것은 사실 조금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순신은 엄연히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육군 지휘관이냐 해군 지휘관이냐를 무 자르듯이 엄밀하게 따지려 드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수군으로서의 업적이 좀더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므로 해군에서 내부적으로 제독으로 칭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해군과 관련이 없고 해군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일반인들이 장군으로 부르는 것까지 무작정 잘못되었다며 제독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이 최선이라 할 것이다.] * [[해병대]] 내에서는 농담 삼이 이순신이 해병대라 말하기도 한다. 이유는 1.북방에서 육상에서 근무했다. 2.제독이 아니라 장군이라고 부른다. 3.결정적으로 신고 있는 군화가 세무워커다. 라고... * 특히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이 존경했다고 한다.[* 또한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 그 존경 덕에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가 [[크고 아름다운|크고 아름답게]] 증축되었고,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현재 사용되는 [[대한민국 원|원화]] 중에 [[100원 주화]]의 앞면[* 보통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https://www.komsco.com/kor/contents/54|'''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전에도 구 500원권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90511032620a000a010-001.jpg|width=100%]]}}} || * 숫제 [[서울특별시|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로 넘쳐나 왜색이 짙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를 누르기 위해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미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부터 널리 숭배하던 인물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전국에 크고 작은 이순신 사당이 여럿 세워졌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물론 추숭도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에 특별히 더 유난히 평가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http://viruns.egloos.com/5116495|역대 추숭을]] [[http://viruns.egloos.com/5118077|찾아서]] [[http://viruns.egloos.com/5119649|정리한 글]] 이를테면 중국 민중의 [[관우]] 신앙과 비슷하다. * 또 [[효종(조선)|효종]], [[숙종(조선)|숙종]], [[영조]] 대(代)에 이순신에 대한 추숭 사업이 여러 번 진행되었고, 숙종 대에는 현충사를 확장하고 거기에 숙종이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정조(조선)|정조]] 대에는 《[[이충무공전서]]》를 내는 등 조선 왕조 후반기 동안 꾸준히 추숭 사업이 이뤄졌다. 특히 정조는 평소에도 이충무공에 대한 열광적인 빠심(?)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는 이의 인쇄 비용을 자신의 사재인 [[내탕금]]에서 보태고,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에서는 아예 '''"이충무공의 집안이야말로 가히 조선의 명족(名族)이라 할 만하다"'''라고까지 극찬한 바 있다. * 무속 신앙에서는 용장군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http://obang.culturecontent.com/obBroker/obViewGod.asp?pGCode=GOD0048&pStyle=1&pSrc=3&pDet=OK|참조]]. 용장군이라는 것은 흔히 물에서 싸우던 무인들을 영령으로 모시는 것[* 사실 무속 신앙에서는 정말 별별 인물들을 다 신으로 모신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남이]] 같은 인물들도 '원한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 모셔진다. 이 외에도 [[더글러스 맥아더]]나 [[관우]] 같은 외국인도 모셔지는 [[https://naver.me/FeCrftHY|경우가 있다]](다만 관우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군에 의해 도입된 까닭도 있다.). 대중에 이름이 알려질만한 군인이면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 맥아더의 경우에는 아직 죽지 않았을 당시에도 신으로 섬겨졌다.][* 무속의 관점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집이 아닌 외지에서 객사했고, 그것도 물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이러한 죽음 방식은 무속에서는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방식이라고 간주된다. 더구나 이순신은 죽기 직전까지도 "적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즉 적들을 모두 몰아내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겠다는 강한 원념을 품고 있었고, 그의 원념과는 달리 일본 주력군은 전멸당하지 않고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죽을 당시의 상황이 비극적일수록, 그리고 생전에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은 인물일수록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특히 강하게 남게 된다는 것이 무속의 설명이며, 이 점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존재하는 신에 대한 관념이기도 하다.]이라고 한다. 무당의 신앙은 무당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충무공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존재한다. 특히 호남 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이순신을 신으로 섬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수의 '[[https://naver.me/GkJcxhHu|영당 풍어굿]]'. 풍어굿은 원래 물고기가 잘 잡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인데, 여수의 '영당'이라는 곳은 충무공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에는 충무공 이순신 뿐만 아니라, [[최영]], [[정운]] 등도 모셔져 있다.] 위치는 여수시 남산동 어항 단지이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방문해서 이 굿을 직접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매해 [[정월대보름]]에 이틀에 걸쳐 굿을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지역 행사처럼 벌인다. 이 굿을 하다 보면 무당이 '''"여수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에 나갈 적에 빈 배로~ 올 적에 만선하야~"'''라고 외친다. 이처럼 일부에서 말하는 것 마냥 무속이나 민간 신앙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일반인들에게 이순신은 [[지장#智將|지장]]의 이미지가 강하고 유독 [[용장#勇將|용장]]의 이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장뿐만 아니라 용장의 덕목도 확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녹둔도 전투]]에서 [[이일]]의 부장으로 종군할 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남아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조선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등 무예를 발휘했으며[* 이 덕에 이순신은 이일이 모함을 했음에도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처벌이 끝났다.], [[명량 해전]] 때는 아예 미적거리는 부장들을 뒤로 하고 '''홀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전세를 뒤집었다.''' * 풍어(豐漁)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청어]] 잡이에 열중했다. 한산도에 개간한 둔전만으로는 병사들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청어잡이로 군량을 때우려 했던 셈.[* 임진왜란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명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비범하게도 명량 해전 이후에는 부족한 군량을 모으기 위해 '해로 통행첩'을 발급해 백성들에게 군량을 거두는 대신 말 그대로 바닷가를 통행할 수 있는 통행 허가증 비슷한 것을 내줬는데 이 결과 군량을 모으는 원 목적을 달성했고, 또한 조선 백성이면 통행첩을 가지고 있으니 '''없는 놈은 일본군'''이란 소리가 되어 간첩선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징비록》에서 이 해로 통행첩이 언급된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아가는 김에, 묘소가 현충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문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충사와 이순신의 묘소는 '''떨어져 있다.''' 현충사는 아산 염치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 이순신의 업적이나 가지고 있는 비중만 보면, 사실상 임진왜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며, 근래 들어 임진왜란의 다른 전투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대다수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이 이순신이 벌인 전투들의 일대기와 몇몇 유명한 육전들을 다루는 수준에서 머무를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책들에서는 이순신이 반드시 언급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경우 아예 주인공급의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보통 임진왜란 하면 십중팔구 이순신을 떠올린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신화와 같은 업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전쟁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순신 혼자서 바다를 막은 것 하나만으로 이긴 것은 결코 아니다. 고금을 통틀어 전쟁의 근본은 육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순신의 업적이 너무 찬란해서 묻힌 사항이지만 당시의 왜군들은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겪으며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가히 역전의 용사들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바다에서 도저히 이순신을 이길 방도가 없자 육지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 이순신의 뒤를 치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전력으로나 수적으로나 열세였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각지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관군과 의병 그리고 승병들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가며 적을 막았기에 전라도와 이순신의 통제영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것이 이순신의 빛나는 승리를 뒷받침했던 것이다.] * 그의 수많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한산도 대첩]] 축제 등 그와 관련된 축제를 여는 지방자치단체가 있으며, 이순신이 해전을 벌인 남해의 모든 지역에는 승첩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여수에는 [[이순신대교]]로 명명된 교량이 있는데, 그 유래는 이 다리의 길이가 1,545m로 1545년생인 이순신의 생년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 현대에는 무략이나 전술·충심뿐만이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십]]과 철저한 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소태산 대종사) 또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였다. 생전의 설법에서 이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이 충무공은 그 마음 쓰는 것이 도(道)가 있었도다. 그는 높은 위치에 있으나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이 모든 군졸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고. 권세를 잃어 일개 마졸이 되었으나 또한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이 말 먹이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 말을 살찌게 했다. 때로 말에게 이르기를. '네 비록 짐승일지언정 국록(國錄)을 먹고 이만큼 자랐으니 국가 존망의 시기를 당하여 힘을 다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오직 위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고 아래를 거느림에 사랑을 다하였으니. 과연 그는 '지(智)와 덕(德)을 겸비한 성장(聖將)'이라 할 만하다." >---- >이순신에 대한 박중빈의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527037|발언]] 재미있게도 원불교에서는 박중빈이 깨달음을 얻어 교단을 연 날을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라 부르며 기념하는데 이 날이 [[4월 28일]]로 [[충무공탄신일]]과도 같은 날이다. * 워낙 유명하고 존경받으며 뛰어나고 유능한 군인의 대표격 인물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군 간부들이 롤모델로 꼽는 인물이다. 물론 군대에 [[우리의 주적은 간부|이런 말이 괜히 팽배한 것이 아니듯]] 대부분이 똥별 행각이나 하면서 [[똥군기|쓸데없는 군기]]만 빡세게 잡는 걸 좋아할 뿐 진짜 이순신의 참된 모습은 조금도 본받을 생각이 없는 게 대부분이다. * [[2015년]] 이순신의 후손인 [[해군사관학교]] 생도 2명이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한 명은 [[2013년]]에 입교한 해사 71기, 다른 한 명은 [[2014년]]에 입교한 해사 72기다. 이중 72기생의 아버지 또한 해군 장교 출신이며, 해사 40기로 최종적으로 [[해군군수사령부]] 참모장까지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하였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1&aid=0002675740|#]] * 갤럽 조사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2014년]], [[2019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