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소선 (문단 편집) == 노동운동 == 전태일의 작고 이후 이소선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전태일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아들이 일하던 평화시장에 피복노조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며, 노동교실을 개소하여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법과 관련된 소정의 교육을 제공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0년 [[전두환 정부|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집권한 이후 강제해산당했지만, 법외 노조로서 제야에서 활동하며 버텼다. 1970년대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장장 40여년간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정권이 사형당한 피해자들을 황급히 화장터에서 화장시키려고 했을 때 이를 저지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뒤, 이소선은 여러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수 차례 구속수감되어 옥고를 치뤘다. 이소선은 노동운동을 하며 총 '''250여차례''' 구속되었고, 3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 과정에서 [[장기표]], [[조영래]], [[김문수]], [[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박원순]] 등 여러 인권변호사와 노동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소선은 헌옷을 팔아 노동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등 금전적으로 좋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민주화 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재웠으며 이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수배중이던 장기표를 자신의 집 장독대에다가 숨겨준 것은 유명한 일화. 이 때문에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이소선을 '엄마', '어머니' 라고 불렀으며 곧 이소선은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칭호까지 받게 된다. 1986년에는 민주화유가족협의희(민가협)을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희생된 운동가들의 유가족들을 돌보는 사업을 하였다. 이 때 민가협의 사무실을 마련해준 사람이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중이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었다. 1986년 노동자 [[https://www.kdemo.or.kr/patriot/name/%E3%85%82/page/3/post/575|박영진]]이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일어났고 박영진 열사는 전신 95%에 화상을 입게되었다.[* 당시 형체를 못알아볼 정도의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하고 심지어 박영진 열사가 분신직후 쓰러질때 경찰은 불을 끄려하는 노동자들을 막았다고 한다. 박열사는 10분동안 불길의 휩사여 방치되었다] 이소선은 박영진의 병상을 지켰고 3월 18일 박영진은 사망했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죽었을때 처럼 통곡했다 한다. 이소선은 80년대 재야운동가로 활동했던 [[양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두 사람 모두와 인연이 있었다. 특히 노무현과는 이석규씨의 장례식과 원전레이온 사태 때 함께 활동하였고 이석규씨 장례식 때는 노무현 혼자만 구속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석규씨의 장지로 가던 중 경찰이 사거리에서 검문검색을 시작하자 노무현이 자신이 가서 해결해보겠다고 짐까지 두고 나갔는데, 노무현은 차 밖으로 나가자마자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소선은 노무현의 짐을 들고 그대로 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훗날 6.10 항쟁 20주년 기념식 참석 차 청와대에 찾아갔을 때, 노무현이 이소선과 악수하면서 이 때의 일을 얘기하기도 했었다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이소선은 장례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국민장에도 직접 참석해 조문했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된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이소선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노동현장에서의 활동과 함께, 주5일제와 노동시간 단축 등 정책을 제안하는 노동계의 원로로 활동하였으며 [[민주노동당]]의 창당 이후에는 진보정당의 원외 진입을 위해 민노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2003년 분신자살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 고공크레인에서 농성 중 사망한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 곽재규 씨의 장례식을 참석하고 주도했다. 이소선의 투쟁활동은 한 때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상대로도 예외가 없었다. 2004년 4월 민주노동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진입에 성공하자, "태일이의 한이 풀렸다" 며 감격의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 후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에도 적극 나섰고 2007년 이랜드 사태 당시에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노조원들을 직접 방문해 격려해 축사를 읽는 등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용산사태 당시에도 80이 넘는 나이였지만 직접 영결식에 참석했고 한나라당 당사를 항의 방문하여 과거사 위원회의 통폐합을 규탄하기도 했다. 반전운동 등 여러 사회활동에도 참여했다.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당시에는 촛불집회에 참석해 SOFA 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 해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정부의 한국군 파병을 규탄하며 반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