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성가 (문단 편집) ==== [[강릉 전투]] ====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은 2개 연대로 편성되어 동해안 지역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제10연대는 38도선에 그리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배치하였다. 사단의 방어지역은 진흑동~기사문리의 26㎞로서 적이 남침하면 강릉 고수를 위해 제21연대를 좌일선에 투입하여 2개 연대로 38선에서 저지.격멸하며, 이를 위해 38도선 남쪽의 고지군에 경계진지를 편성하고 광원리-오대산-연곡천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6월 중순에 사단은 공비토벌을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오대산과 계방산 일대에 투입함으로써 적의 남침시 실제 가용병력은 4개 대대 규모에 불과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5사단은 양양-강릉의 해안도로 축선에 주력을 투입하여 북쪽에서 제10연대를 정면공격하고 제766 유격부대와 제549 육전대를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상륙시켜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함으로써 2개 연대를 각개 격파하고 강릉을 남북으로 협공하려 하였다. >이러한 계획하에 적 제1경비여단이 6월 25일 04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주문진으로 진격하자, 38도선을 경계하던 제10연대의 전방부대들은 적의 포병화력에 압도되어 분계선 남쪽의 저지진지로 철수하였으나 저지진지도 점령하지 못하고 제2대대는 주문진으로 그리고 제1대대는 광원리 부근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상륙한 1개 연대 규모의 적의 육전대는 삼척-강릉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밤재를 점령한 후 1개 대대는 강릉을 향해 북상하고, 또 다른 1개 대대는 옥계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또한 07시경에는 임원진에 제766유격부대가 상륙하여 1개 부대는 태백산맥으로 침투하고 1개 부대는 삼척 방향으로 북상하였다. >강릉비행장에 본부를 둔 제8사단 이성가 대령은 상황보고를 접하고 제10연대로 하여금 적을 최대한 저지하게 하고, 삼척의 제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주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서 적을 격퇴하기로 하였다. >육 군본부에 대한 증원요청이 좌절되자 이성가 사단장은 전쟁의 장기전을 예견하고 6월 25일 10시를 기해 작전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수품의 소산과 군경 가족의 피난, 공공기관의 소개 등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간 차량의 징발을 통해 기동력을 확보하였다.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적의 후방상륙에 대처하기 위해 57㎜ 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강릉 남쪽의 안목-안인진 일대로 급파,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던 적의 선단을 격퇴하였으며, 제4중대는 안인진 서쪽 대포동의 방어진지에서 북상중이던 1개 중대 규모의 적을 격멸함으로써 위급한 국면을 타개하였다. 그러나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강릉 남쪽 군선강에 방어진지의 급편을 결정하고 제10연대장에게 그 임무를 지시하였다. >한편 삼척의 제21연대장은 북평의 제1대대 수색대와 제1중대가 옥계 부근에서 남하하는 적 1개 중대를 기습공격하여 궤멸적 피해를 가함으로써 적의 상륙과 또한 적의 주력이 밤재를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릉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제21연대장은 이로 인해 북평-백복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 이동, 주력은 26일 10시 30분경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였고 제3대대는 강릉으로 행군 본대와 합류하였다. >전투편성을 완료하고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한 사단 공병대대는 전방대대인 제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고, 제21연대의 군선강 배치완료 후 연狙?방어배치를 조정하면서 반격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제10연대 2대대가 6월 26일 밤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을 공격 탈취하여 주문진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자 사단은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적이 27일 4시경 제8사단의 주문진 공격보다 1시간 앞서 공격준비사격을 천마봉에 집중하자 제2대대는 천마봉을 포기하고 분산철수 하였으며, 상황보고를 받지 못한 아군은 측방으로 접근하는 적을 아군으로 오인함으로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때 증원된 제21연대 3대대가 사천선에 투입되어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적을 저지함으로써 최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제18야전포병대대는 포 단위 사격을 계속하여 주저항선을 돌파한 적의 진출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으며, 이로 인해 철수병력이 사천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한편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전 전선의 전황을 알 수가 없자 일단 대관령으로 물러나 상황 추이에 따라 반격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27일 14시를 기해 사단은 철수를 개시하여 대관령을 넘었고, 사단사령부와 제10연대는 유천리에 그리고 제21연대는 횡계리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적은 21시 50분경 강릉에 진입하게 되었다. >사단장은 2개 연대의 재편성 상태를 점검한 후 강릉탈환을 결심하고 공격명령을 하달, 28일 아침 제2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제10연대 1대대도 구산리 동측 칠봉산에서 공격제대를 측방 엄호하였으며, 포병은 대관령 동편 보광리 입구에서 화력지원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6사단사령부로부터 “원주로 철수하라”는 육본의 명령을 받은 제8사단은 공격을 중지하고 대관령으로 철수, 29일 원주로 향했으나 횡성 피탈 사실을 피난민으로부터 확인한 사단장은 목표를 제천으로 변경하였다. >제8사단장은 강릉에서 철수한 후 남한강 남안에 2개 연대를 배치하여 북한군 제8사단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아군은 적 사단의 전방지휘소는 물론이고 도하를 시도하는 적에게 공격을 가해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적으로부터 배후의 위협을 받고 죽령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한 채 방어에 돌입하였다. >제8사단은 이 지역에서 6일 동안이나 방어선을 유지함으로써 충주 방면의 북한군 제12사단이 단양 점령을 위해 전환투입되게 하여 전력운용의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고, 반면에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획득하였다. > 다만 동해안 축선에서 8사단이 벌인 전투는 "북한군은 동해안축선의 기동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최용호 (2001).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분석. 군사(43), p.43]는 소련군 군사고문단 보고서 분석 논문의 지적대로 개전 초 북한군 공세작전에서 가장 부차적이었으며, 유일하게 최우선 목표인 서울 점령과도 관계 없는 축선이었다.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된 서부전선이나 작전적 포위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북한군 2군단 주력이 유입된 6사단 정면과는 임무의 중요성도, 투입된 전력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8사단을 공격한 북한군은 정규 보병사단이 아니라 1개 보병연대로 증강된 제1경비여단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