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선희 (문단 편집) === 1984년~1990년: 압도적인 데뷔와 전성기 === [[파일:84.png]] 1984년 TV쇼 프로그램 출연 장면. 이선희는 1964년 12월 14일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자랐다. 1984년 제 5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같은 과 선배 임성균[* 참고로 이분은 [[슈퍼스타K3]] 미국 지역 오디션에 참가했다.]과 "4막 5장"이란 팀으로 참가하여 <[[https://youtu.be/2oX5508oI6g|J에게]]>로 대상을 수상하고 큰 관심을 모으면서 데뷔했다. 이 때 부모님에게 나간 걸 들킬까봐 전날 급히 파마를 했다고 한다. 유달리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선희가 당시를 회상하면서 "지금은 ‘어떻게 저런 패션이 다 있어?’ 할 것 같아요. 당시에는 아줌마 파마밖에 없었어요. 파마하기 전 저는 굉장히 멋있을 거라고 상상했죠. 그 모습이 얼마나 쇼킹했던지, TV를 보고 고등학교 때 화학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당시 패션리더였던 선생님은 제게 ‘폭포 파마라는 것이 있는데, 하필 그런 아줌마 파마를 해서 내 제자라는 것을 창피스럽게 만드니?’라고 하시더라고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선희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장욱조 음악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한 작곡가가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악보를 '이거 제가 불러도 되느냐'고 말하고 주워 왔는데, 이 악보의 곡이 바로 <[[J에게]]>였다고 한다. 이 작곡가는 이세건, [[민해경]]의 <사랑은 이제 그만>을 작사/작곡했던 인물이다. 여담으로 이 시절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을 연상시킨다고 방송 금지곡이 되지 않을까 하는 농담도 있었다. 실제로 "J~ 아홉시 뉴스에~"라는 식으로 [[땡전뉴스]]를 풍자할 때 이 노래가 사용되었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바지만 고수하는 옷차림의 보이시한 매력으로 남성팬보다 여성팬을 더 많이 보유한 가수로도 유명했다. 일명 '언니부대'의 시초이다. 당시 이선희의 무대 영상을 보면 남자 아이돌의 무대에서나 나올 법한 여성팬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선희의 언니 부대의 규모가 어마어마해, 회사에서 돈을 주고 사람을 동원했다는 유언비어마저 떠돌 정도로 언니 부대의 위력은 위대했다. 또한 이선희의 동그란 안경과 커트 머리가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유행할 정도로 소위 '이선희 신드롬'을 일으켰다. 수줍은 소년 같은 외모와 바지 의상만을 고집하는 독특한 이미지 메이킹은 남성 팬 뿐만 아니라 여성 팬들에게도 ‘이선희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고, 퇴폐 풍조를 배격하는 사회 분위기는 이선희와 같은 건전한 이미지의 가수가 나래를 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놓은 상황이었다. 이선희는 이에 더해 가녀린 듯 하면서도 고음에서는 강력한 힘을 표출하는 특유의 보컬 능력과 젊은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들을 앞세워 인기몰이에 나설 수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pgRMHBXJ6s)]}}}|| || 1984년 [[KBS 가요대상]] '[[J에게]]' 영상. || 당시 타 방송사에서 데뷔한 가수는 다른 방송사에 출연하지 못했던 관례를 깨고, [[MBC]] 가요제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1월 25일 [[KBS]]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84년 KBS 방송 가요대상 신인상, '84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 신인상, 10대 가수상으로 최초 3관왕에 오르는 등 데뷔 직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나 신인상은 1984년 초반에 '그것은 인생', 후속곡 '물 같은 사랑'으로 인기를 끈 최혜영의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던 상황이었는데, 그녀가 단 한달 간 보여준 임팩트만으로 이를 압도하면서 신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심지어 [[MBC]]에서 데뷔한 신인이 [[KBS]]의 신인상을 말이다.] 경이로운 점은 이 때까지 정규 앨범 한 장도 없이 [[MBC 강변가요제]] 출전곡인 '[[J에게]]' 하나만으로 이 모든 상을 휩쓸었다는 것이다. 이 때 [[MBC]]-FM에서 '[[J에게]]'가 하룻동안 무려 16번 방송되면서 FM 라디오 하루 최다 방송 횟수 기록을 세웠다. 이후로는 PD들이 자체적으로 이러한 중복 선곡을 피하고 있다고 한다. 1985년 첫 음반 《아! 옛날이여》가 발매되었고 그녀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J에게]]'와 록적인 스타일이 가미된 '아! 옛날이여' ,'[[갈등(이선희)|갈등]]' , '소녀의 기도' 등 수많은 곡이 히트하며 등장과 동시에 [[KBS]] [[가요톱10]]에 무려 7곡을[* J에게, 아! 옛날이여, 갈등, 소녀의 기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이 말을 하고 싶어요, 혼자된 사랑 이상 7곡이다.] 진입시키며 큰 인기를 끌었다. '아! 옛날이여'[* <아! 옛날이여>는 1983년 가수 진필이 먼저 부른 곡인데, 당시 제목은 <그때와 지금>이었다.]로 1985년 4월 8일 가요부문 통합 1위를 차지했고 발라드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도 그녀의 가창력이 빛이 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6년 초 2집 《갈바람》[* 1집 앨범을 작곡자 송주호의 곡들로만 채웠다면, 2집은 [[박건호]], [[이범희]], 이현섭, 이호준 등 당대의 주류 작사가와 작곡가들에게 다양하게 곡을 받아 제작했다. 이선희의 자작곡으로 처음 수록된 <바람 속에서>는 이후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녀가 가진 가능성을 보여줬다.]이 발매되면서 '갈바람', '괜찮아[* <괜찮아>는 그녀가 출연했던 보령제약의 거담제 ‘용각산’의 광고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화제가 됐다.]', '연인의 눈물',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는 가요 차트 1위곡은 아니었지만 여러 음악 차트와 순위 리스트에서 인기를 얻었다.], '서울의 밤' 등이 인기를 모으며 TV가이드, 뮤직박스 1위로 선정되고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상, [[KBS]] 방송 가요대상,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갈바람이 인기를 구가하던 도중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와 후렴 부분이 같다." 라는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바람에 곡 일부가 수정되어 다시 발표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86년 '이선희 학생 가장 돕기 콘서트'라는 타이틀을 걸고 공연을 시작했다. [[홍익대학교]]에서 첫 공연을 한 이후 수년 동안 학생 가장 돕기 및 장한 청소년 돕기 공연을 이어가며 그 수익금을 학생 가장들에게 기부했다. 소년, 소녀 가장들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그 당시 그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이선희였다.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회계층을 향한 따뜻함이 남달랐던 그녀는 이후에도 [[위안부]] 할머니 보금자리 마련을 위한 공연 등을 이어나가며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꾸준히 따뜻한 마음을 베풀었고, 그녀의 이런 선행은 팬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나눔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s0IerlBi5E)]}}}|| || 1987년 3집 수록곡 '영'의 [[KBS]] [[가요톱10]] 영상 || 1986년 말 3집 앨범 《[[알고 싶어요]]》[* 최고 인기 가수의 위상에 걸맞게 이 앨범에는 남국인, 윤희중, 김홍탁, 최종력, 양시춘, 김희갑, [[이범희]] 등 무려 7명의 유명 작곡가가 참여했다.][* 총 12곡의 수록곡 중 크게 히트한 노래는 앨범 A, B면 첫 트랙을 장식한 <잃어버린 약속>, <늦었어요>가 아니었다. 이 앨범의 최대 히트곡은 인기를 끌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A면 다섯 번째 트랙 <영>과 B면 네 번째 트랙 <알고 싶어요>였다.]가 발매되었으며 대표곡 '알고 싶어요'는 1987년 [[KBS]] [[가요톱10]] 5주 연속 1위를 하면서 두 번째로 골든컵을 수상하는 주인공이 되었고 한 달 방송 횟수 107회, [[MBC]] 라디오 음악차트에서 15주 연속 1위 기록을 배출했다.[* 당시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이선희가 <알고 싶어요>의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라는 첫 부분의 가사를 부르면 그녀의 팬 홍당무들이 "언니요!!!!!!!"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 외 '영', '어둠은 걷히고' 등이 히트했다. 여담으로, '알고 싶어요'[* 누구나 이선희를 오리지널 가수라고 여겼음직한 <알고 싶어요>는 사실 그녀보다 2년 먼저 남자 가수 이승제가 발표한 노래였다. 처음 발표했을 때의 제목은 <가을나무 사이로>였고 가사도 달랐다. 원곡 가수 이승제는 <눈동자>, <아득히 먼 곳>으로 잘 알려진 가수였다. 이선희의 대표적인 히트곡 <알고 싶어요>가 1984년 발표한 이승제의 독집에 이미 수록한 노래라는 점을 아는 대중은 그리 많지 않다.] 곡을 양인자와 [[김희갑]]이 만든 후 소설가 이재운이 허락을 받고 소설 "황진이"에 노래 가삿말을 인용해서 한시로 실었는데, 이게 반대로 알려져서 선후 관계가 바뀌어 알려진 경우가 많다.[* 1995년 조선일보에 「청사홍사」라는 칼럼을 연재한 작가 이재운이 양인자의 양해를 얻어 이 곡의 가사를 한시로 바꿔 발표한 것이 오해의 원인이었다.] 1집부터 3집 앨범 활동 당시 이선희는 본인이 작사, 작곡한 노래들을 지구레코드 사에 가져갔으나, 묵살당했다고 한다. 1980년대 당시에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더러 가수와 작사, 작곡가의 영역을 확실히 나누어 생각했던 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1집부터 3집을 발매한 지구레코드 사와의 전속계약이 끝난 뒤 그녀의 4집 음반부터는 서울음반(현 [[로엔엔터테인먼트]])에서 발매하게 된다. 1988년 4집 《사랑이 지는 이 자리》[* 이 앨범은 [[클래식(음악)|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싱어송라이터]] 송시현과의 음악적 교류를 통해 작업한 첫 앨범이기도 하다.] 에서는 '[[나 항상 그대를]]'으로 [[KBS]] [[가요톱10]]에서 3번째로 골든컵을 수상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70년대 [[신중현]]과 뮤직 파워(26인조 악단)의 '[[아름다운 강산]]'[* 최초로 브릿지 파트 위에 "빰빰빠바밤 빠바밤~ 빠바밤 빰빰 빠라바밤바밤밤~" 하는 보컬을 덮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 부분이 곡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선희 특유의 스타일이 강하게 반영된 버전이라, [[신중현]]의 원곡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는 이선희의 리메이크 곡이 원곡을 마치 건전가요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당시에는 폭압적 군사 정권의 문화 통제 시책으로, 발매되는 모든 앨범엔 그 가수 노래든 아니든 무조건 건전가요를 한 곡씩 넣어야 했으므로 원곡이 그에 반대해 만들어진 곡임에도 리메이크가 건전가요가 됐다고 생각할 만하다. ][* 리메이크는 편곡과 연주가 아쉬운 반면 이선희의 가창은 뛰어나다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1988년 발매본에 한정해서 말이다. 2001년 이선희 12집 'My Life + Best'에서 리메이크하여 발매한 [[아름다운 강산]], 즉 현재 이선희가 MR로 사용하고 있는 버전은 현대적인 밴드사운드로 신중현의 대곡을 새롭게 해석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선희의 리메이크로 <아름다운 강산>이 새롭게 주목받았으며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8분이 넘는 원곡은 명곡임엔 틀림없으나, 긴 연주와 읊조리는 듯한 보컬로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대중성에서는 바닥이었다. 명료하고 깨끗한 보컬과 빠빰빠밤하는 강한 추임새로 확 다르게 부른 이선희가 아니었다면 <아름다운 강산>이 지금과 같은 국민적 애창가요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을 리메이크하며 폭발적인 가창력을 드러내며 인기를 끌게 되고, 그 밖에도 '[[사랑이 지는 이자리]]', '안녕' 등이 히트하게 되었다. 다른 방면으로는 만화 주제가 '[[달려라 하니]]'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인만큼 행사가 많이 열렸는데, 각종 행사의 대미를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이 장식했다. 1989년 5집 《한바탕 웃음으로》[* 이 음반은 윤희중, 송시현, [[김창완]], [[김범룡]], 이재성 등이 작곡한 신곡 총 10곡을 수록했고, 이선희 1집의 히트곡 <갈등>의 작사자이자 전 남편인 윤희중이 설립한 해광기획에서 제작했다.]에서도 '[[나의 거리]]'[* 이 곡으로 이선희는 DJ 인기 집계 2개월 1위, MBC FM 여론조사 1위 등을 차지하며 인기를 얻었다.]로 [[KBS]] [[가요톱10]]에서 4번째 골든컵을 수상했고, 후속곡인 '[[한바탕 웃음으로]]'[* 이 노래는 당시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곡이다.]가 1990년에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전성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선희는 1989년, 1990년 한 앨범으로 2년 연속 골든 디스크상을 차지했다. 그 외에 '[[겨울애상]]', '불꽃처럼', '[[오월의 햇살]][* [[윤복희]]의 오빠인 [[윤항기]] 목사가 작사, 작곡, 편곡하고, 이선희가 작사에 참여하였으며,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뜻이 담겨 있는 곡이다.]' 등의 노래가 히트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홍콩]] 배우 [[장국영]]과의 조인트 콘서트를 개최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때 한국인 가수로는 최초로 홍콩 퍼시픽레코드와 로열티 15%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영어]] 음반을 발표했다. 이선희의 데뷔곡인 '[[J에게]]'를 포함한 4, 5집의 수록곡 중 몇 곡을 추려서 영어로 번안해 홍콩과 한국에서 음반을 낸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당시 큰 인기를 모았던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의 주제곡을 불러 청소년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던 이선희는 그 인기에 힘입어 [[피터팬]], [[오즈의 마법사]], [[박문수]] 등의 어린이 뮤지컬에 출연하며 전회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가창력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 뛰어난 연기력까지 보여준 이선희는 세대를 뛰어넘어 당대 최고의 핫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1hq2iuEstm0)]}}}|| || 1991년 [[KBS]] 쇼! 토요특급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영상. || 1990년 6집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를 발매하며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2014년 3월과 4월 방영된 KBS 2TV 「불후의 명곡」 이선희 편에서 박정현이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를 불렀다. 작은 체구로 열창하는 모습은 이선희와 비슷해 색다른 감동을 줬다. 2015년 10월 방송된 케이블채널 M-net의 오디션 예능 프로그램 「슈퍼스타 K7」에서 천단비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를 열창하며 이선희와의 추억을 언급했다. 2016년 5월 방송된 SBS 「일요일이 좋다 - 판타스틱 듀오」에서 마지막 무대에 오른 이선희와 예진아씨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를 선곡해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2016년 10월 MBC 「일밤-복면가왕」에서 시네마천국으로 출연한 슬기도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를 불러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이외에도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는 수없이 리메이크되는 등 1990년대 여성 발라드의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그리운 나라', '왜 나만' 등이 히트했다. 5집《한바탕 웃음으로》의 수록곡 '한바탕 웃음으로'가 골든디스크상 5회 연속 수상, 6집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로 [[KBS 가요대상]] 최우수 가수상 6년 연속 수상, [[MBC]] 10대 가수상 6년 연속 수상을 했다. 전성기 시절 이선희는 발매되는 앨범마다 대표곡 뿐만 아니라 앨범의 모든 노래가 히트하는 쾌거를 안았다. 또한 폭발적인 가창력 속에서 남다른 감성으로 노래했던 이선희는 노래에 담았던 그 감성을 글로 써내 1990년 4월 <떠나는 자만이 사랑을 꿈꿀 수 있다>라는 자작시집을 발간했다. 시집과 함께 발매된 낭송집은 노래를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으로 당시 10대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대형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해 오랫동안 상위권에 오르며,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교보문고, 종로서적 베스트 셀러 1위에 올랐다.] 대중가요와 클래식은 전혀 다른 장르로 인식되어 있던 시절, 이선희는 199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캐나다]] [[몬트리올]]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통해 대중들에게 다양한 음악적 들을 거리를 제공했고, 몬트리올 협연 라이브 실황 앨범을 발매했다. 5집 앨범은 엄청난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1989년도 음반 판매량 2위에 오른다. 1989년도 MBC 10대 가수 가요제는 엽서 집계 ( 순수 인기 투표 ) / 음반 판매량 / 방송 횟수 / 여론조사 4가지를 조사하여 종합점수로 10대 가수를 선정하였는데, 이선희의 경우 엽서 집계 1위, 음반판매량 2위, 방송횟수 2위, 여론조사 4위였다. 6집 앨범 역시 1990년도 음반 판매량 3위를 차지했다. 1989년의 경우 양대 방송사 가요대상에서 이선희는 엽서집계 1위, 음반판매량 2위, 방송횟수 2위, 여론조사 4위를 차지했고, 1990년의 경우 엽서집계 1위, 음반판매량 3위, 방송횟수 7위, 여론조사 3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1996년 [[머라이어 캐리]]의 그래미 어워드 수상 실패와 비슷하게도 대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특히 [[KBS 가요대상]]의 경우 1985년, 1986년 여자 대상을 차지한 정수라와 1988년, 89년에 트로트 가수로서 대상을 휩쓴 주현미, 현철이 당시에도 지금도 가장 의문이 드는 대상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선희는 데뷔곡부터 6집까지 매 앨범마다 [[KBS]] [[가요톱10]] 1위 곡[* 데뷔곡 'J에게', 2집 '갈바람', 3집 '알고 싶어요', 4집 '나 항상 그대를', 5집 '나의 거리', 5집 '한바탕 웃음으로', 6집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을 배출하면서 가요톱10 골든컵(5주 연속 1위) 수상 횟수 역대 2위(4회), 1위 횟수 역대 2위(26주)에 랭크, [[MBC]] 10대 가수 가요제 10대 가수상 6년 연속 수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6년 연속 수상,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 5년 연속 수상, 가배상 5년 연속 수상 등 국내에 있는 모든 부문의 상을 모조리 다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우며 빛나는 최전성기를 보냈다. 콘서트 활동 * 1986년 ~ 1990년 '학생가장돕기 이선희 콘서트' 개최 * 1986년 ~ 1990년 '장한 [[청소년]]돕기 이선희 여름콘서트' 개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