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색(고려) (문단 편집) == 여담 == * 같이 문과에 급제한 [[박상충]]의 처남이기도 하다.[* 이색과 박상충은 고려 문과 1위, 2위로 급제하였다.] * 1388년 [[문하시중]]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시 이성계의 아들 [[태종(조선)|이방원]]을 소위 [[인질]] 격으로 동행하여 명나라에 함께 데려갔다. 원래는 자신이 창왕과 함께 직접 명에 입조해 왕위계승을 인정받을 생각이었는데 태후의 반대로 창왕이 가지 못하자 자신이 떠나 있을 때 이성계가 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자고 했으나 이성계는 그 대신 자신의 아들 이방원과 함께 가라고 달랬다. 이방원은 장남 방우나 차남 방과처럼 전주 이씨 가문의 후계자급 인물은 아니었지만 가문 내 유일한 과거 급제자로서 이성계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었기에 이색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없는 사이 선양을 받거나 찬탈을 하지는 않겠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홍무제|주원장]]이 원나라에서 과거까지 급제한 이색에게 [[중국어]]를 해보라고 했으나 주원장이 이색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주원장은 인사 치레조로 "원나라에서 한림을 했다니 한어(중국어) 좀 하겠네?"라고 말을 건넸는데 이색은 "친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주원장은 못 알아듣고 옆에 있던 예부 관리가 [[통역]]을 해 주고서야 알아 들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색은 [[원나라]]의 [[북경어]]로 말했으나 주원장이 남방 출신이어서[* 당시엔 수도도 [[난징]]이었다. 주원장이 죽고 아들끼리 싸운 끝에 [[영락제|연왕]]이 이겨서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으로 옮겨간 것.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방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지금도 강남 지역의 [[광동어]]는 북경어에 기반을 둔 [[표준중국어]]와 같이 대화를 붙여 보면 거의 [[외국어]] 수준으로 소통이 안된다. 예컨대 하나 일(ㄧ, 1)의 발음은 표준중국어로는 이(yī)지만 광동어론 얏(yat1)이다.] 이색의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주원장은 이색이 구사하는 중국어를 두고 "그대의 중국말 하는 것은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하고 웃었고 이색은 돌아와서 "나는 [[홍무제|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어볼 줄 알고 이것저것 준비해 갔는데 황제는 정작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만 물어보더라"고 하면서 주원장을 두고 "마음에 줏대가 없다[心無所主]"고 깠다.[* 당시 이색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막기 위해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신탁통치]]~~ 감국(監國)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국가 중대사를 논하려 했는데 말장난이나 하고 왔으니 이색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했던 것.] 이 사건은 홍무정운의 발행을 비롯해 중국의 표준어를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문자의 옥]] 등의 반발이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만 서로 발음이 너무 달라서 소통이 안될 정도였다면 이색 또한 주원장의 질문을 못 알아듣고 통역을 통했어야 정상인데 기록대로라면 이색은 주원장의 질문을 통역없이 알아듣고 대답을 했다. 주원장도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음에도 일부러 원나라 억양이 강한 걸 [[조롱]]하기 위해 못 알아듣겠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진짜 중요한 밀담을 나눴지만 그걸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무엇보다도 당시 사신단 일원 중에 이방원이 있었다.] 저렇게 얼버무렸을 가능성도 있다. * [[태종(당)|당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 맞았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림관에서 지은 정관음(貞觀音)이라는 시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인 줄 알았으나 어찌 검은 꽃이 흰 깃에 질 줄 알았으랴(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쓴 것이 그것.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3|목은 선생이 당대에 좀 배운 사람인데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라고 하면서 《[[동사강목]]》에 실었지만... * [[세조(조선)|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과 [[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 훈구와 사림은 현대인들 생각처럼 딱 나뉘는 [[정당]] 같은게 아니다. 고려 말의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도 마찬가지.] 하지만 [[사육신]] 중 1명인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지함]]이다. 그리고 이지함의 조카인 [[선조(조선)|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가 이색의 7대손이다. * 이색의 또 다른 손자인 이맹균 ^^(1371년 ~ 1440년)^^은 [[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훗날의 [[문종(조선)|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죽였다고 하며 시체마저도 길가에 내다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바로 세종대왕이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이런 짓은 심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직시키고 이씨와 이맹균을 귀양보냈다. 그나마 황해도 우봉헌으로 귀양간 이맹균은 몇달도 안돼 병으로 다 죽어갔고 세종은 어차피 이젠 죽을 거 귀양을 풀어줬으나 이맹균은 한양으로 오던 도중 개성에서 숨졌다. 이씨는 남편 장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귀양을 풀어줬지만 이후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 훗날 19세기 초엽 먼 후손[* 이름이 유실되었는데, 한산 이씨로, 이색의 먼 후손이라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 중 한 명이 길주로 유배를 가서 1807년 9월부터 11월까지 총 약 2개월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북정일기]]를 작성하는데, 이 서적은 19세기 초엽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유배인의 생활을 담아낸 기록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영종도]]의 옛 이름인 '자연도'를 제목으로 한 시를 썼다. [[영종 씨사이드파크]] 캠핑장 부근 방죽에 이 시가 설치되어 있으나 관리 부실로 글자가 떨어져 나간 게 몇 개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은 영종도에 이색을 유배보내어 몰래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모의했었던 적이 있다. * 정도전은 당시 동문이었던 [[이숭인]] 등을 장형을 집행할 때 황거정, 손흥종[* 이 둘은 정도전 전용 킬러로 활약했으며, 특히 손흥종은 왕씨 학살 등 개국 과정에서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태종 시기에 서인으로 강등되고 가산이 적몰되어 알거지가 되었다. 대간에서는 몇 번이나 이들을 처형할 것을 주청했으나 집행되지 않았다.] 등의 수하들을 시켜 몽둥이를 엉덩이가 아닌 등골에 내리쳐 집행하는 방법으로 살해했는데, 이색의 아들인 이종학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려 했다. 그런데 형 집행 현장에서 이색의 문하생인 김여지가 판관이 되어 이를 막았다.[* 이종학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여러 칭찬을 받고 사법살인을 당한 점이 참작되어 기려지는 인물이지만, 유학의 종주이면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색의 아들로 다년간 과거시험을 주관해 문생들을 등용했기에 이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고 한다. 결국 죽기는 했지만, 이 때는 그것이 자기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 당시 실제 현장에서 사법살인을 막은 문생 김여지는 후일 재수사 당시 이종학의 암살에 대해 증언하면서 이성계의 뜻과 배치되는 살인행위임을 주장했다.] 결국 아예 유배처에 갇혀 있던 이종학에게 암살자 손흥종을 보내 한밤중에 몰래 목졸라 죽였으나, 이것이 후일 조정에서 재수사되어 신원되었다. 이색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고 당시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려는 신원 작업을 위해 수하들에게 죄를 씌우려는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탄핵 운동이 활발하게 일었고, 심지어 [[남은]]의 형인 [[남재]]도 암살 음모를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되었을 정도. * [[권근]], [[하륜]] 등이 이색의 비문과 행장에 기술하면서 "당시(공양왕 시기)의 권력자(用事者)가 공을 꺼려서 장단으로 귀양보냈다"와 같은 기술을 했다가 이것이 당시의 실권자이던 태조 이성계를 가리킨 것이 아니냐는 대역죄, 필화 사건으로 비화된 적이 있다. 태종은 권력자란 조준과 정도전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는 입장을 밝혔다. 당황한 하륜이 이에 반박하는 사죄문을 길게 써서 몇 장이나 올리니까 귀찮다고 무시하는가 하면, 대간에서 "[[공양왕]] 시기에는 조준이 권력을 잡은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이성계를 말한 것이 맞다" "전하께서도 이색의 행장을 보고 분노해 찢어버리고 검열하지 않으셨느냐"등의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할 말이 없어져서 '''"어허, 내가 병이 발작해 들어주기가 어려우니 물러가라"''' 같은 어이없는 소리까지 하며 이를 무시했다. * [[유교]]의 종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어서 이 점이 두고두고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거꾸로 [[불자#s-1|불자]]였던 이성계는 불교를 믿는 것이 유학자들인 신하들에게 공격받을 때마다 어색하게 '''"유학의 종주인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그럼 니가 이색보다 잘났냐?"''' 같은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3.15|꼰대식 반박]]을 시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